아름다운 Classic,Aria, Ext....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1935

concert1940 2007. 10. 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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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파바로티 엘범모음


01- (디 카푸아)오 솔레 미오


02- (딜라)카루소-with Lucio Dalla Dalla


03- (토스티)작은 입술


04- (카르딜로) 무정한 마음


05- (보비오) 패숀


06- (케루비니) 맘마


07- (베르디) 청아한 아이다


08- (도니제티) 남몰래 흘리는 눈물


09- (도니제티) 아름다운 밤


10- (베르디) 내마음 평안해 질 때


11- (베르디) 타오르는 마음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1935.10.12]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1935.10.12]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테너'로서 
첫 손가락에 꼽혀온 가수다. 성악은 목소리가 악기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타고난 목소리의 탁월함을 필요로 한다. 목소리의 
양감, 질감, 색감이 뛰어나고, 고르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일단은 훌륭한 가수가 되는 데 지극히 유리하다. 
파바로티는 일단 멀리 뻗어나가는 고르고 큰 성량과 목소리의 
고운 질감, 맑고 깨끗한 색감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나다. 
테너로서 갖춰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테너 성부의 
고역을 노래할 때, 위와 같은 성질들이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빛난다는 장점을 갖고 있으므로 
그가 '최고의 테너'로 꼽히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는 카라얀과 더불어 20세기 후반에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클래식 음악가다. 
1935년 이탈리아의 모데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한 살 어린 미렐라 프레니와 같은 유모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유모에게서 섭취한 영양분이 특수했던 탓일까.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목소리를 지니고 화려하게 성악계에 등장했다. 
프레니가 63년 스칼라에 데뷔한 것에 비한다면 파바로티가 
스칼라 무대를 정복한 것은 조금 늦은 감이 있는 1965년,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다. 
그 이전인 61년, 레초 에밀리아의 아키레 페리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같은 도시 가극장에서 로돌포를 불러 오페라 가수로서 데뷔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20세기 후반을 풍미하는 대가수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63년에 빈 국립가극장에 역시 로돌포 역으로 데뷔했고, 
코벤트가든에는 디 스테파노의 대역으로 역시 로돌포를 불러 데뷔했다. 
연주활동 초반에 '라 보엠'의 로돌포 역은 '바로 파바로티 
그 자신'으로서 인식되었을 정도다. 97년 3월호 <객석>이 선정한 
'최고의 로돌포'도 역시 파바로티였다. 
이렇게 먼저 이탈리아 밖에서 인정을 받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64년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 65년에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 데뷔한 그는 이후 정상급 무대에 뒤늦은 데뷔를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 거의 철인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리리코 배역은 물론, 리리코 레지에로까지 
자유자재로 소화하며 빛나는 목소리로 가는 곳마다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당시의 주요 레퍼토리는 로돌포를 비롯, 에드가르도('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 만토바 백작('리골레토'), 핑커튼('나비부인'), 
이다만테('이도메네오') 등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 도니제티, 벨리니, 베르디 등 거의 모든 벨 칸토 
오페라의 배역을 소화하다시피 한 그는 80년대 들어 좀더 무게 중심이 
낮아진 목소리를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역까지 자신의 레퍼토리 영역으로 
끌어 당겼고, 베리스모 오페라까지 손을 뻗쳤다. 
81년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콩쿠르를 창설한 그는 
90년대 들어서 몇십만, 몇백만 규모의 대군중을 동원하는 
야외 공연의 개념을 확립해 나갔다.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구설수에도 올랐던 이 공연은 월드컵, 그리고 다른 두 테너와 결합해 
'스리 테너'로서 모습을 바꿔 이어지고 있다. 
그의 음반은 거의 모두가 데카에서 나온 것들이다. 
프레니와 함께한 '라 보엠'(72년, 카라얀-베를린 필)이 역시 
대표적인 음반으로 꼽힌다. 메타 지휘의 런던 심포니, 
그리고 서덜랜드와 함께한 푸치니 '투란도트'도 좋다. 
역시 서덜랜드와 함께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70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71년)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벨칸토의 명반. 
하늘로 간 천상의 목소리 … 
‘세계 3대 테너’ 파바로티 타계 
'천상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 세계적인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7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파바로티의 매니저 테리 롭슨은 
파바로티가 6일 오전 5시(한국시간 6일 정오)에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이메일을 통해 밝혔다.
세계 3대 테너로 불리며 폭넓은 사랑을 받아 온 
‘천상의 목소리’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6일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지난해 7월 췌장암 수술을 받은 파바로티는 지난달 고열증세로 
모데나병원에 입원하는 등 병세가 심상치 않았다.
1935년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제빵업자의 
외아들로 태어난 파바로티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오페라 애호가인 아버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파바로티는 
61년 이탈리아 레조 에밀리아의 아킬레 피레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서 루돌포 역으로 데뷔했다.
68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에서 ‘라보엠’을 공연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다양한 레퍼토리에다 완벽한 
벨칸토 창법은 물론 극적인 역할까지 두루 소화하면서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성악가로 자리잡는다. 
파바로티는 90년 로마월드컵 전야제에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3 테너 콘서트’를 연 것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서 대규모 관중을 동원하는 야외공연도 열었다.
91년 런던 하이드파크 공연 때는 무려 15만명의 관객이 모았고,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된 지난해 2월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는 
3만 5000명의 관중을 사로잡았다.
파바로티는 77년 이화여대 독창회를 시작으로 93,2000,2001년 
내한공연을 가졌다. 현재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그의 CD도 30종 이상이다.
파바로티의 전성기 때 시사주간지 타임은 “태어날 때 
하느님이 목에 키스를 했다.”며 그의 목소리를 칭찬했다. 
타고난 미성에다 쭉쭉 뻗는 힘찬 고음으로 ‘하이C(3옥타브 도)의 
제왕’이란 별명도 붙었다. 하지만 전성기 이후 
오페라 무대를 떠나 간간이 자선공연이나 콘서트에 출연하면서 
‘고급이미지로 돈을 번다.’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성악가로 꼽히는 테너 엔리코 카루소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성악가로 사랑받아 온 파바로티의 타계로 
인류는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 하나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