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도화지 속 세상
concert1940
2008. 1. 9. 09:28
다섯 살 난 손자가 방바닥에 엎드려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달이 지난 달력 한 장을 뒤집어 놓고 배를 깐 채 무엇인가를 그린다. 한참 후 손자는 "할머니 나 기린 그렸다" 제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한 듯한 얼굴로 그림을 내 앞에 내민다.
과연 다섯 살 박이 그림치고는 꽤 잘 그렸다. "어 정말 잘 그렸네,,. 요엘이가 그림을 잘 그리는 구나” 나는 손자에게 진심으로 칭찬을 해 주었다. 두 뺨에 홍조까지 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솜털이 보스스하고 단아한 작고 예쁜 손자의 얼굴 속에 내 어린 시절이 되살아난다.
어렸을 적 나도 그리기를 좋아했다. 빈 종이만 보면 무엇인가를 쓰고 이상야릇한 그림을 그려서 아버지께 보이며 으쓱거렸다. 아버지는 늘 그런 내게 그림공부를 시키고 싶어 하셨고 헌 책사를 찾아가 오래 된 화집을 몇 권이고 구해오셨다. 외국 화가의 그림이 수록된 화집을 펴 보이시며 그 중에서 골라 그리게도 하셨다.
지금 같으면 학원에 보내면 될 일이지만 내가 어릴 땐 그림공부를 맡아 지도할만한 곳이 없었다.
한 석봉 천자문 사본을 구해다 붓글씨도 매일 쓰게 하셨던 아버지는, 아직 여물지도 않은 딸에게 큰 기대를 가지시고 마음이 바빠하셨으나 그분의 생각과는 달리 내가 그리는 그림은 언제나 내 얼굴뿐이었다.
인물을 그리는 화가가 되려느냐고,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봐야 한다고 하시며 못마땅해 하셨지만 나는 매일 다른 나만을 그렸다. 눈망울이 크고 입이 앵두처럼 도톰하고 눈썹이 초승달처럼 예쁜 나를 그렸다. 가장 귀엽고 아름다운 얼굴의 나를 상상하면서. 내 얼굴만을 그린 도화지는 수북수북 쌓여만 갔다.
어느 날, 아버지는 대구신문에 실린 ‘세계아동 미술 공모’가 있다는 소식을 들고 오셨다. 나는 비로소 내 얼굴을 그리는 습작에서 벗어나 느티나무 밑에서 장기 두는 노인들의 한유를 그렸다. 한 여름 매미 여치가 울어대는 한가한 오후의 시골정경이었다. 오직 자신의 얼굴만을 그리던 솜씨로 할아버지들의 표정을 세밀히 잘 그렸다며 아버지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그림공부를 시킬 마음을 단단히 하시는 듯 했지만 끝내 그분의 염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했다. 그 후로 풍경이나 정물을 즐겨 그렸고 전공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갤러리를 자주 찾는 편이다. 어쩌면 그 꿈 많던 도화지속 세상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게 아닌가 싶다.
누구나 한번쯤은 도화지속 하얀 세상을 동경하며 유년의 꿈을 그려본다. 나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되고 싶은 인물이 되어 때 묻지 않은 새하얀 우주에 오색 칠을 하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어 한다. 언젠가는 동화 속 왕자와 공주처럼 백마를 타고 아름다운 숲속을 달려보기도 하고, 어느 때는 백만장자가 되어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쳐 어느 곳이든 마음껏 날아다니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본다. 새 하얀 도화지 속 세상에 가장 되고 싶은 나를 그리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손자는 몇 시간 째 엎드려 동물들을 그린다. 노란공룡과 파란사자와 빨간 기린도 그린다. 초식공룡과 육식공룡을 그려놓고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하여 내게 열심히 설명을 한다. 아이의 조그만 마음가운데 세워놓은 거대한 세상 속에서 이제 막 바깥세상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미지의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곳, 푸른 숲처럼 청청하고 맑은 세상을 살아 갈 아이다. 꿈이 자라나는 환상의 도화지속 세상에 살고 있는 아이가 부럽기만 하다.
과연 다섯 살 박이 그림치고는 꽤 잘 그렸다. "어 정말 잘 그렸네,,. 요엘이가 그림을 잘 그리는 구나” 나는 손자에게 진심으로 칭찬을 해 주었다. 두 뺨에 홍조까지 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솜털이 보스스하고 단아한 작고 예쁜 손자의 얼굴 속에 내 어린 시절이 되살아난다.
어렸을 적 나도 그리기를 좋아했다. 빈 종이만 보면 무엇인가를 쓰고 이상야릇한 그림을 그려서 아버지께 보이며 으쓱거렸다. 아버지는 늘 그런 내게 그림공부를 시키고 싶어 하셨고 헌 책사를 찾아가 오래 된 화집을 몇 권이고 구해오셨다. 외국 화가의 그림이 수록된 화집을 펴 보이시며 그 중에서 골라 그리게도 하셨다.
지금 같으면 학원에 보내면 될 일이지만 내가 어릴 땐 그림공부를 맡아 지도할만한 곳이 없었다.
한 석봉 천자문 사본을 구해다 붓글씨도 매일 쓰게 하셨던 아버지는, 아직 여물지도 않은 딸에게 큰 기대를 가지시고 마음이 바빠하셨으나 그분의 생각과는 달리 내가 그리는 그림은 언제나 내 얼굴뿐이었다.
인물을 그리는 화가가 되려느냐고,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봐야 한다고 하시며 못마땅해 하셨지만 나는 매일 다른 나만을 그렸다. 눈망울이 크고 입이 앵두처럼 도톰하고 눈썹이 초승달처럼 예쁜 나를 그렸다. 가장 귀엽고 아름다운 얼굴의 나를 상상하면서. 내 얼굴만을 그린 도화지는 수북수북 쌓여만 갔다.
어느 날, 아버지는 대구신문에 실린 ‘세계아동 미술 공모’가 있다는 소식을 들고 오셨다. 나는 비로소 내 얼굴을 그리는 습작에서 벗어나 느티나무 밑에서 장기 두는 노인들의 한유를 그렸다. 한 여름 매미 여치가 울어대는 한가한 오후의 시골정경이었다. 오직 자신의 얼굴만을 그리던 솜씨로 할아버지들의 표정을 세밀히 잘 그렸다며 아버지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그림공부를 시킬 마음을 단단히 하시는 듯 했지만 끝내 그분의 염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했다. 그 후로 풍경이나 정물을 즐겨 그렸고 전공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갤러리를 자주 찾는 편이다. 어쩌면 그 꿈 많던 도화지속 세상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게 아닌가 싶다.
누구나 한번쯤은 도화지속 하얀 세상을 동경하며 유년의 꿈을 그려본다. 나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되고 싶은 인물이 되어 때 묻지 않은 새하얀 우주에 오색 칠을 하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어 한다. 언젠가는 동화 속 왕자와 공주처럼 백마를 타고 아름다운 숲속을 달려보기도 하고, 어느 때는 백만장자가 되어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쳐 어느 곳이든 마음껏 날아다니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본다. 새 하얀 도화지 속 세상에 가장 되고 싶은 나를 그리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손자는 몇 시간 째 엎드려 동물들을 그린다. 노란공룡과 파란사자와 빨간 기린도 그린다. 초식공룡과 육식공룡을 그려놓고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하여 내게 열심히 설명을 한다. 아이의 조그만 마음가운데 세워놓은 거대한 세상 속에서 이제 막 바깥세상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미지의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곳, 푸른 숲처럼 청청하고 맑은 세상을 살아 갈 아이다. 꿈이 자라나는 환상의 도화지속 세상에 살고 있는 아이가 부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