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이매창 그는 누구인가/민남혜

concert1940 2008. 7. 16. 21:17

이매창 그는 누구인가

매창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양한 기록들이 있으나 매창집의 발문에 따르면 매창은 1573년에 출생해서 

38세를 살고 1610년에 세상을 떠난것으로 나와있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 부안 군청뒤 성황산 서림공원에 올랐다. 인천의 자유공원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곳이다.

서쪽의 변산과 김제평야를 보려했으나 빗속에 가려서 볼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이매창이라는 이름석자는 뚜렸이 떠오르고 있었다. 

부안의 진산 상소산 기슭의 서림공원에 오르면 매창의 시심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시비 (詩碑)가 있다. 서림공원은 본래 부안현감의 관사인 선화당의 후원 일부라고 하며 매창이 관아에 들어오면 자주 거닐던 곳이라고 전한다. 또 매창시비 오른쪽에는 ‘금대(琴臺)’ 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매창이 자주 앉아 거문고를 뜯던 곳이고, 매창시비 왼 쪽에는 혜천(惠泉)이라는 샘터가 있으니 또한 매창이 즐겨 마시던 샘이라고 한다. (참고: 매창공원은 읍내 한가운데에 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시집 매창집은 매창이 직접 편찬한 것이 아니고 매창이 죽은 이후 아전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던 것을 매창이 죽은 후 60여년 후에 매창이 생전에 자주 찾아 마음을 다스리곤했던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하는 이가 너무 많아 절의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판을 불살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부안 사람들은 그녀의 시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규장각본 가곡원류에 실려있는 "이화우" 

 

梨花雨 흣날릴 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 

秋風落葉에 져도 나를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쾌라.  

 


 
 
매창묘는 2001년에 새단장을 하였다.
 
 
▲ 매창공원 가운데에 매창의 묘가있고 그 주변은 시비와 꽃나무로 둘러싸여있다.
 

 

▲ 월명암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한 월명암은 경관이 수려하다. 월명암 뜰에 서면 변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발아래 깔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암자 뒤 낙조대(落照臺)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점점이 늘어선 고군산군도의 뭍섬들이 아름답다. 

이 절의 이름이 월명(月明)인 것도 그 일대에서 목격되는 달 뜨는 정경 또한 기막히기 때문이다. 월명암은 본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호남의 명승(名僧)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가 중건하였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암자에선 허다한 고승들이 배출됐다. 선가(禪家)에선 대둔산 태고암, 백양산 운문암과 함께 도인을 많이 키워낸 3대 성지로 손꼽힌다/ 

 

 
 
 
▼ 아래는 이매창 추도 시비 
 

 
▲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추모글( 편지)

 

부안읍 봉덕리에 있는 매창의 묘(지방기념물 제65호) 

매창공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않다. 주택단지의 놀이터정도의 규모 약 1,000 여평정도 크기로 

세월이 지나 그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서로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에도 그들은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고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 입구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 사람들은 그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묘는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 매창이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바쳐 사랑한 남자는 촌은 유희경 한사람뿐이었다. 매창이 촌은을 처음 만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0년 또는 1591년으로 추정된다.  당시 매창은 18~ 19세, 촌은은 28세 연상인 46~ 47세였다. 비록 빼어난 미색은 아니지만 다재다능하며 심지가 굳은 매창으로 하여금 첫눈에 반하게 만든 촌은은 어떤 사내였던가. 

촌은 유희경도 매창과 마찬가지로 천민이었다. 비록 신분은 같은 천민이지만 상대는 중앙문단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시인 유희경이 아닌가. 감격에 겨운 매창도 이에 화답하여 두 사람의 정은 갈수록 깊어져 갔다. 하지만 촌은은 서울에 집도 있고 처자식도 있는 몸. 비록 알아주는 남자를 위해 치마끈은 풀었지만 유부남과 독신녀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고 괴로운 법이다.

 

매창은 그렇게 깊은 정을 주고 떠난 촌은을 천리보다도 더 먼 꿈길에서나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시조 ‘이화우 흩날릴 제’도 한 번 간 뒤 돌아올 줄 모르는 야속한 님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읊은 것이다.

이렇게 천리를 두고 그리운 마음만 오거니가거니 하는 중에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기에 바빠 매창에게 소식을 전할 겨를이 없었다. 

 

 

 

변산반도의 시작은 부안이다. 그러나 변산여행마감은 월명암에 오르지 않고 변산을 말하지 말라. 변산반도에 가거들랑 성황산에 올라 변산주변을 둘러보고 찾기 쉽지않은 매창공원에 들러 막걸리 한잔이라도 부으며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짧은 생을 살다간 천재 시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월명암
월명암은 변산면소재지(지서리)에서 5km정도 떨어진 변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쌍선봉(雙仙峰:498m) 아래에 자리잡아 있다.
지서리에서 출발하여 남여치 매표소쪽으로 들어간 다음에 관음약수터, 쌍선봉을 지나 낙조대에서 내변산의 경치를 구경한 후 들를 수 있다. 남여치매표소에서 약 1 시간 거리이다. (내소사 입구 전나무숲길에서 등산길로 접어들어 3시간정도 거리에 있다.)

변산8경에 있는 월명무애(月明霧靄)가 있는곳, 산정상에서 일출과 바다안개 그리고 밝은 달을 볼 수 있는게 특징이다.

월명암은 수난을 많이 겪어온 절로, 여러 차례 중수를 해오다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가 다시 중수하고, 헌종 14년(1848)에는 성암화상(性庵和尙)이대수축을 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한말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1908년에 다시 불타고 말았다. 이후 학명선사에 의해 1914년 다시 세워졌으나 1950년 6.25사변 직전 여순반란군이 이곳에 잠입하여 싸우던 중 또 다시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후 1954년 원경(圓鏡) 스님이 군내 각 기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지었고, 1996년 중수를 하여 오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월명암에 닿으면 변산의 군봉들이 발아래에 와닿고 월명암 뒤 산정상에 있는 낙조대에 오르면 고군산군도의 뭍섬들이 보인다.

築蘭若倚半空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一聲淸磬徹蒼穹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客心 若登도率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
讀罷黃庭禮赤松「황정경」을 읽고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다.

 '월명암에 올라서(登月明庵)' 적송자는 신선의 이름으로 신농 때의 우사(雨師)다.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면 그곳에 서방정토가있다 하였는데 통일 신라 시대의 고승들도 이곳에 와서 더 이상 서쪽으로 갈 생각을 접어두고 이 곳에 서천법계를 열었던 것이다.x-text/html; charset=iso-8859-1" volume="0" showstatusbar="1" autostart="true">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