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스승의 손/정호경

concert1940 2008. 9. 28. 18:57
정호경



밥 먹는 데나 잠자는 데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하지는 않지만, 나의 목 디스크는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혀 왔다. 나의 기억으로는 한 20년 정도 된 듯한데 맑은 정신으로 다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그보다 몇 년은 더 묵은 것이 아닌가 싶다. 병원에 가서 전문의에게 말하면 대뜸 사진 찍기를 명령하며 내일 다시 오라는 것이다. 사진 촬영이라고 하면 두말할 것 없이 얼굴 사진일 것이요 내용에 따라 돌, 회갑, 혹은 졸업 등속의 기념사진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를 수년 동안 괴롭혀 온 일종의 골병인데 뭣을 기념할 일이 있다고 사진을 찍으라는 것인지. 더구나 얼굴도 아닌 목뼈를 말이다.


하얀 가운에 은테 안경을 받쳐 낀 젊은 의사는 벽에 걸어 놓은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며 예전에 심한 충격을 받은 적이 없느냐고 한다. 다시 말해서 중학 시절에 말타기놀이를 하다가 떨어져 땅바닥에 목뼈가 부딪쳤다거나 혹은 군대 생활에서 머리를 마룻바닥에 받친 채 벽에 기대 거꾸로 서 있는 물구나무서기 벌을 한두 시간 당했다거나 그렇잖으면 한밤에 쳐들어 온 도둑을 쫓다가 몽둥이에 얻어맞았다거나 하는 이런 사건에 대한 경력을 두고 하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의사는 청진기에 앞서 환자의 관상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에 따라 병명을 유추해서 알아낼 줄 아는 예리한 판단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이 가볍고 왜소한 다람쥐형의 몸집으로 보아 말타기놀이에서 떨어질 리 만무하고 또 창백하고 말라빠진 서생(書生)의 얼굴로 보아 도둑이 탐낼 만한 집주인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어찌하여 서지 않았던 것일까.


가장 빠른 효과는 수술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40대 초반에 위장병으로 칼질을 당했던 터이라 두 번 다시 그런 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약물 복용과 물리치료밖에 없지 않느냐고 해서 그것은 치료 기간이 너무 길어서 삶이 지루하지 않겠느냐고 하니까 다른 병원으로 가 보라며 돌아앉아 버렸다.


대학 은사이신 난대(蘭臺) 선생님은 요즘 지압 공부를 하셨다면서 나의 병 증세에 대해 부쩍 관심을 가지셨다. 그런 디스크는 병원에 가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걱정 말고 당신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초보적인 기술에 잠깐 망설이기도 했지만 제자는 마땅히 스승을 따라야 함이 제 길이라고 생각되어 길일을 택해 선생님 연구실을 찾아 나섰다. 홍익대학 근처 서교동에 있는 ≪수필공원≫ 편집실 한쪽에 서재 겸 침대도 갖추어 놓은 별실이었다. 고서들이 방안을 가득 메운 실내 풍경은 마치 고물상이나 시골 한약방 같은 풍경으로 고리타분한 냄새가 풍겼지만 그런 대로 참을 만했다.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안정감을 되찾은 뒤 침대에 누웠더니 배를 깔고 엎드리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실내의 분위기에 불안했던 데다 과연 인턴 지압사에게 나의 운명을 맡겨 놓아도 괜찮을까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작업은 시작되었다. 엎드려 있는 나의 허리에 올라앉은 스승의 체중은 생각보다 중량급이었다. 가뜩이나 허약 체질인 제자는 사자를 등에 업은 인팔라 신세가 되어 이대로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떠나는구나 싶었다. 허리에서부터 주물러 올라오는 순서는 막상 환부인 목에서 절정을 이루어 나는 서서히 저승으로 가고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백발이신 그분 정도야 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나의 오산이었다. 안간힘을 쓰고 엎드려 있는 나는 등을 덮쳐 누르는 이 사랑의 고문을 순간이나마 물리쳐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외마디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 가엾은 제자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계속 목을 눌러댔다. 30분 남짓으로 이 고된 작업은 끝났지만 나는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 뒤 한 달쯤 지나서 난대 선생님께 점심 대접이나 할 양으로 연구실을 찾아갔다.
“좀 어때, 이제 말끔히 나았지?” 하시며 치료 결과를 물으셨다. 나는 선생님의 손마디를 옆눈으로 슬쩍 훔쳐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뒤 저는 일주일 동안이나 드러누워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생님을 찾아뵈려고 제 발로 걸어오게 된 것만도 천운으로 생각합니다.”


제자의 목뼈는 전보다 한쪽으로 더 비뚤어지기는 했지만,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주신 스승의 헌신적 보살핌에서 나는 다시 한번 사제간의 따뜻하고 끈끈한 정을 느꼈다. 이제 난대 선생님도 80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으니 노을진 들녘이 쓸쓸하기만 하다. 하지만 손마디의 그 억센 힘은 아직도 젊은이 못지 않으니 좋은 세상 오래오래 누리실 것으로 믿는다.


“목이 아프면 다음에 또 와요.”
나는 허리 굽은 스승의 손마디를 생각하며 늦은 밤 혼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