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concert1940 2009. 4. 1. 12:04


대학로에 있는 정미소엘 갔다. 20여 일 간의 공연이어선지 공연장에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연극인을 만나러 온 진지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정미소극장은 실험극장으로 모 연극인이 심혈을 기우려 만든 건물인데, 건축가의 자유분방한 미적 감각이 은은하게 풍기고 소박함이 엿보인다. 무대 가장자리 시멘트의 거친 부분들은 드러낸 표현이 아닌 매끄럽지 않아도 감춰진 뒷마무리가 멋들어지다.

연극주제는 프랑수아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주인공의 새롭게 시도한 음악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 이색적인 모노로그다. 브람스의 아름답고 촉촉한 음악과 영상이 함께 내레이션을 도와 가슴 뭉클한 저 편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며 가슴을 흔든다.

학생시절 클래식에 파묻혀 심취해본 때가 있었다. 종로 뒷골목에 있는 ‘르네상스’라는 클래식음악 감상실에 틀어박혀 신청곡을 여러 번 건네며 몇 시간씩을 보냈다. 그 곳에서 제일 먼저 만났던 음악이 베토벤 바이올린 곡이었는데 이곡은 베토벤이 유일하게 남긴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이 곡을 완벽하게 외우게 된 것은 수개월이 지나서였고 다음으로 만난 곡이 브람스곡이다.

어느 날 우연히 브람스 첼로소나타를 들으며 그 곡에 매료되어 그 곡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차츰 브람스의 가슴 아팠던 사랑과 그의 음악세계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감상실에 비치되어 있던 문헌을 빌려 밤늦도록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설레기도 하면서 브람스에 빠져들었다.

브람스 가슴속엔 어느 날 운명 같은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스승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사랑하게 된 브람스는 감정을 억누르고 자제하면서 고뇌와 번민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음악에는 우수와 깊은 외로움이 묻어있다. 클라라를 연인으로 품고 그녀만을 사랑하면서도 홀로 애만 태워야하는 그의 음악에는 가슴을 아리게 하는 애끓는 사랑의 비가 내리고 있다.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독백을 읊어본다.
우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래고 /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 다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남이란 단어가 맴돌곤 합니다 / 어처구니없이...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만 / 당신을 좋아한다고는 하겠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할 때면 외로운 것입니다 / 당신은 아십니까 /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워진다는 것을...

주인공은 멋들어진 정장을 걸치고 카리스마가 풍기는 표정과 목소리로 독백을 한다. 마치 사강처럼, 브람스처럼. 어둑한 무대의 조명아래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 그녀는 16세기 그 시절의 클라라가 되기도 하고 술과 담배와 무절제 속에서 두 사람의 삶을 비웃는 사강이 되기도 한다. 클라라를 연모하며 독신으로 살던 브람스의 ‘강철 같은 사랑’, ‘브람스의 눈물’, ‘나의 사랑은 녹색’ 같은 우수에 깃든 선율을 타고 깊은 사유와 애정으로 표현한다. 가슴이 떨려오고 숨이 가쁜 순간이 몇 번이나 교차한다.

핏빛 같은 붉은 드레스의 그축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 멜로디를 프랑스 샹송가수 제인 버킨이 편곡해 부른 ‘페드라의 노래’를 재해석하여 부른다. 심장이 펄펄 끓는 그녀의 감성에 급속으로 빨려 들어감을 멈출 수가 없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사랑과 행복감인가.
나는 조용히 눈물을 삼킨다. 스승의 부인 클라라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끝내 타인이라 스스로 뇌이던 브람스, 그의 음악 곳곳에 사랑에 목말라하는 절절한 사랑이 절정에 다다른다.

목젖을 스쳐 횡격막을 짓누르는 지나간 옛 사랑의 소용돌이가 멈출 줄을 모르고, 내 안에 머물지 못한 그리움이 되살아 가슴속이 터질듯하다.
프랑수아 사강과 브람스, 클라라 슈만의 영혼을 불러내어 잠시 동안이나마 핑크빛 꽃잎에 내 마음을 실어 준 그녀에게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