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조화(調和)의 맛 /정호경

concert1940 2010. 2. 21. 12:31

                        

 전라도 지방에서는 오래된 김치를 '묵은지'라고 한다. 고리타분한 냄새를 풍기는 이것을 예전에는 누가 거들떠보기라도 했겠는가. 그런데 요즘 이것이  소뼈가 아닌, 값싼 돼지뼈와 어울렸을 때의 그 조화로운 맛에 우리는 무릎을 친다. 묵은지나 돼지뼈나 별로 쳐 주지 않는 하품(下品) 아닌가. 그런데도 이것들의 어울림에서 맛볼 수 있는 별난 조화미(調和味)에 우리는 놀라고 감탄한다.


 이 고장의 이름난 음식을 든다면 무엇보다 맨 앞장을 서는 것이 ‘장어탕’이다. 하지만 장어탕이라고 다 맛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장어탕이라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집이 따로 있다. 거기에는 그 집만의 오랜 세월을 통한  맛내기 비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재료들끼리의 사연 있는 궁합인가. 그래서 한번 그 집에서 맛을 본 사람이라면 거리에는 관계없이 꼭 그 집만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 계속하다 보면 물리게 마련이다. 사람의 입맛은 이렇게 간사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뜻밖의 별미가 새로 생겨 성황이다. 다름 아닌 ‘간장게장’이다. 이곳 봉산동 뒷골목에 한두 집이 생기면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그러다 보니 그 일대가 하루아침에  게장거리로 변해 외지에서 소문 듣고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해 시(市)에서는 길가에 큼직한 안내판까지 세워 줄 정도로 ‘게장’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래서 나도 호기심이 생겨 친구들과 함께 그 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간신히 한 자리를 얻게 되었다. 잠시 후 밥상위에 올라온 대망의 그 녀석들은 온몸을 철갑으로 무장한 무적용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놀라 얼른 입속의 엉성한 틀니를 재정비하면서 좌중을 둘러보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게다리 바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른들보다 초등학생 남녀 꼬마들이 의외로 더 열중하고 있었다. 서울 꼬마들이 어찌 이 맛을 알겠는가. 이것이 바로 운명적인 ‘신토불이(身土不二)’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내가 어렸을 적의 눈 내리는 날은 온 세상이 원시로 돌아간 듯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래서 나와 강아지는 모처럼 하얀 눈밭의 친구가 되어 크리스마스와는 아무 상관없이 종일 즐거웠다.  

 그런데 요즘의 강설(降雪)은 무엇인가. 아름답고 눈부신 설경(雪景)이기보다 산동네는 길이 막혀 고립되고, 자동차들은 제 마음대로 나뒹굴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교통대란에다가 산더미 같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시설하우스가 차가운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으니 그 속의 수많은 가축들이 갈 곳은 어디이겠는가.

 하늘과 땅 그리고 산과 바다가 서로 어우러져 계절이 순환하며 그에 따라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니 이것이 말 그대로 자연의 조화이고 질서인 줄 안다.


 나는 요즘 우리나라의 어지러운 정치마당을 보면서 내 고장 이것들의 맛깔스러운 조화(調和)의 맛을 생각한다.

 각설하고 날씨나 좀 풀렸으면 좋겠다. 너무 추워 오줌이 얼어서 고드름이 달린다. 그래도 3월이 되면 봄은 다시 찾아올 것이다.

                                 ‘여수동부매일신문’ 2010.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