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메뚜기와 방울벌레

concert1940 2010. 6. 29. 19:35

 

 

 

                                      川端 康成 가와바타 야스나리 作  정혜자 옮김 2010. 6. 18

 

  

대학의 벽돌담을 따라 걷다가 벽돌담을 벗어나서 고등학교 앞으로 접어들면, 나란히 선 하얀 나무 봉(棒)으로 둘러 쌓인 교정(校庭)이 보인다. 교정에는 짙게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벚나무 아래 어슴푸레한 수풀 속에서 벌레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벌레 소리에 잠시 걸음을 늦추고 귀 기울여 본다. 벌레 소리가 아쉬워서 다시 고등학교 교정과 멀어지지 않기 위해 오른쪽 길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오른쪽으로 더 방향을 틀면, 나무 봉 대신 탱자나무를 심어놓은 방죽이 시작된다. 왼쪽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에, 어쩌면 저런! 하는 탄성과 함께 두 눈을 반짝거리며 앞쪽을 바라보고 종종 걸음으로 달려갔다.


앞쪽 방죽의 기슭에, 한 무리 귀여운 오색 초롱불(提燈)의 불빛이 적막한 시골의 풍년 기원 축제처럼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보지 않아도, 어린애들이 방죽의 수풀 속에서 벌레를 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초롱불은 스물 남짓. 초롱불 하나 하나가 빨강, 복숭아 색, 짙푸른 파랑, 초록, 보라, 노랑 등 갖가지 색으로 불을 켜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등불이 오색의 빛을 발하고 있는 것도 있다. 가게에서 산 듯한 둥근 빨간 등도 있다. 그러나 많은 등(燈)은 어린이들이 고심하고 연구해서 자기 손으로 만든 귀여운 사각형 초롱불이다. 이 적막한 방죽에 스무 명의 어린이들이 모여들어 아름다운 등불이 흔들릴게 될 때 까지는 하나의 동화(童話)가 아니면 안 된다.


마을의 한 아이가 어느 날 밤 이 방죽에서 벌레 우는 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밤에는 빨간 초롱불을 사가지고 우는 벌레의 집을 찾아 나셨다. 다음 날 밤에는 한 아이가 둘이 되었다. 새로 오는 아이들은 초롱불을 가게에서 사지 않았다. 작은 종이 상자의 안팎을 잘라 내고 거기에 종이를 붙인 다음 안에다 촛불을 켜고 위쪽에 끈을 달았다. 다섯 명이 되었다가 일곱 명이 되었다. 종이 상자를 잘라서 불빛이 내비치도록 창문을 뚫은 다음 종이에 색 색 가지로 그림을 그려서 창문에 붙이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리고 지혜가 있는 어린 미술가들은 종이 상자를 군데군데 동그랗게 세모지게 혹은 보리이삭처럼, 나뭇잎 모양처럼 뚫어서 작은 창마다 제각기 다른 색깔로 칠하고, 다시 동그라미나 보리이삭이나 빨강이나 초록을 사용해서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장식 무늬로 만들었다. 가게에서 둥근 빨간 등을 샀던 아이도 멋없는 그 기성품을 버렸고, 자기가 만든 단순한 디자인의 초롱불을 가졌던 아이도 그것을 버렸다. 어제 밤 손에 들었던 초롱불의 빛의 무늬는 다음날에는 이미 불만스러워졌다.

 

낮에는 종이 상자와 종이와 색칠 붓, 가위, 작은 칼, 풀 등을  앞에 놓고 매일매일 새로운 초롱불을 정성껏 창작해냈다. 내 초롱불 좀 봐! 이렇게 예쁜 것 못 봤지! 하고 외치면서 밤마다 벌레를 잡으러 나갔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내 눈 앞에 보이는 저 스무 명 아이들의 아름다운 초롱불 잔치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하염없이 멈춰 서서 눈을 크게 뜬 채 바라보았다. 사각형 초롱불은고대풍의 무늬로 뚫었다. 꽃 모양으로 뚫었을 뿐만 아니라, 예을 들어, [요시히코]라든가 [아야코]이라든가 하는 만든 사람의 이름이 또렷한 글씨체로도 뚫려 있다. 초롱불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달라서 두꺼운 종이를 뚫어서 거기에 종이를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무늬 자체가 그대로 불빛 창이 된다.  무늬 그대로 색과 형태가 촛불에 비춰 빛이 되어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한 스무 개의 등불이 수풀에 비춰지고 어린아이들은 똑같이 한 마음으로 벌레 소리에 매달려 방죽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누구, 메뚜기 갖고 싶은 사람 없니? 메뚜기.” 하고, 혼자만 다른 아이들과 서너 발자국 떨어져 수풀 속을 들여다 보고 있던 남자애가 몸을 일으키면서 갑자기 소리쳤다.
“나, 줘. 나, 줘.”
예닐곱 아이들이 달려갔다. 그리고 벌레를 발견한 아이의 등 뒤에 포개질 듯 서서 수풀 속을 뚫어지게 들여다 봤다. 달려간 아이들이 내민 손을 물리치고 벌레가 있는 수풀을 지키려는 듯한 자세로 우뚝 선 남자애는 오른 손 초롱불을 흔들고 나서, 다시 한번 서너 걸음 떨어져 있는 저쪽의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누구, 메뚜기 갖고 싶은 사람 없니? 메뚜기.”
“나, 줘. 나, 줘.”
네 다섯 아이가 달려왔다. 정말 메뚜기라도 반가울 정도로 벌레를 잡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남자 아이는 세 번 째 외쳤다.
“누구, 메뚜기 갖고 싶은 사람 없니?”
두 세 명이 다가왔다.
“어서 줘. 제발.”
새로 다가온 여자애가 벌레를 발견한 남자애 뒤에서 말했다. 남자애는 가볍게 돌아다보고 나서 순순히 몸을 구부리고 초롱불을 왼손에 쥐는 대신 오른손을 풀 속에 집어넣었다.
“메뚜기야.”
“괜찮으니까 어서 줘.”
남자애는 얼른 일어나면서 꼭 쥐고 있던 주먹을, 자아! 하는 모양으로 여자애 앞에 내밀었다. 여자애는 왼손에 들고 있던 초롱불의 끈을 손목에 걸고 두 손으로 남자애의 주먹을 감쌌다. 남자애가 조용히 주먹을 폈다. 벌레는 여자애의 엄지와 인지 사이로 옮아갔다.
“어머! 방울 벌레잖아. 메뚜기가 아니네.”하고 여자애는 갈색의 작은 벌레를 보고 눈을 반짝 빛냈다.
“방울 벌레다! 방울 벌레다!”
아이들은 부러운 듯이 입을 모아 외쳤다.
“방울 벌레네! 방울 벌레네!”
여자애는 벌레를 준 남자애에게 지혜로운 밝은 눈길을 반짝 하고 보내고 난 후 허리에 차고 있던 벌레 바구니를 끌러서 그 속에 벌레를 넣었다.
“방울 벌레야.”
“아아, 방울 벌레네.”하고 방울 벌레를 잡았던 남자애는 중얼거리며, 벌레 바구니를 얼굴 가까이 쳐들고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다. 여자애에게 자기의 오색으로 빛나는 초롱불을 올려서 밝게 비춰주면서 여자애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가! 하며 나는 남자애가 조금 미워짐과 동시에, 비로서 이 남자애의 아까부터의 소행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 나의 우둔함을 한탄했다. 앗! 하고 놀랐다. 봐주게나! 여자애의 가슴을, 이것은 벌레를 준 남자애도, 벌레를 받은 여자애도,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애들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애의 가슴 위에 비치고 있는 초록색의 아련한 빛으로 [후지오]라는 남자애의 이름을 확실하게 읽을 수 있다. 여자애의 벌레 바구니 옆으로 들어올린 남자애 초롱불의 불빛 무늬는, 그대로 여자애의 가슴에 비치고 있다. 초롱불이 여자애의 하얀 덧옷에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후지오]라는 이름자 모양으로 뚫어 놓은 창은 초록빛 무늬의 후지오 이름을 그대로 여자애의 가슴에 그려준다. 왼손 손목에 매달았던 여자애의 초롱불은 아직 그대로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빨간빛의 여자애 이름 [기요코]도 남자애 허리 근처에서 흔들리고 있다. 남자애 이름만큼 밝지는 않지만 기요코라고 흐릿하게나마 읽을 수 있다. 이 초록색과 빨간색의 장난을---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후지오도 기요코도 모른다.


그리고 후지오는 방울벌레를 주었던 것을, 기요코는 방울벌레를 받았던 것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려고 해도, 후지오는 자신의 이름이 초록빛으로  기요코의 가슴에 씌여졌고 기요코의 이름이 빨간빛으로 자신의 허리에 씌여졌던 것을 모른다. 기요코는 자신의 가슴에 초록의 빛으로 후지오의 이름이 새겨졌고 후지오의 허리에 자신의 이름이 빨간빛으로 새겨졌던 것을 꿈에도 몰랐기에 추억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후지오 소년이여! 자네가 청년의 시절을 맞이하더라도, 여자에게 ”메뚜기야.”하면서 방울벌레를 주었는데 여자가 “어머나!”하고 기뻐하는 것을 보거든 회심의 미소를 흘려주게나. 그리고 또 “방울벌레야.”하면서 메뚜기를 주고 여자가 “어머나!”하고 슬퍼하는 것을 보거든 회심의 미소를 흘려주게나.


이제 또다시, 자네가 아이들과 떨어져서 혼자 수풀 속에서 벌레를 찾고 있던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렇게 방울벌레는 존재하지 않아, 자네가 또 메뚜기 같은 여자를 붙잡아서 방울벌레라고 굳게 믿고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후로, 자네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상처받고 있기 때문에 진짜 방울벌레마저 메뚜기로 보이고, 메뚜기만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때야 말로, 오늘 밤 자네의 아름다운 초롱불의 초록 불빛이 소녀의 가슴에 그리고 있던 빛의 장난을 생각해야 하련만. 자네 자신은 추억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으니 참으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