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조선의 왕릉

concert1940 2010. 9. 2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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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역은 크게 능침(성역) - 제향(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공간) - 진입(속세)의 세 공간으로 나뉜다. 풍수사상에 따라 능역 그 자체가 자연 환경의 일부라 생각되도록 조영하는 자연 친화적인 방식은 같은 동양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다. 능역의 크기나 봉분 조영 방식, 문 · 무석인 등의 석물과 기타 시설물 배치 등은 기본적으로 조선왕릉의 상설 제도(象設制渡)를 따랐으나 왕릉 조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가감과 변화가 적용되었다. ‘상설’은 ‘형상을 설치한다’는 뜻의 말로, 능역에 설치한 모든 시설물과 석물을 일컬으며, 이에 해당하는 배치 규범은 ‘상설 제도’라 한다.
상설 가운데 특히, 석물 곧, 병풍석과 난간석, 문 · 무석인 등의 크기나 조각 양식은 시대에 따라 그 예술성을 달리하여 조선왕릉을 시대적 정서를 읽어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능침 공간의 핵심이 되는 시설은 봉분이다. 봉분은 주변 산세와 지형에 따라 단릉 · 쌍릉 · 합장릉 · 삼연릉 · 동원이강릉 · 동원상하릉 등 다양한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왕릉 부분은 원형의 봉분 양옆과 뒤쪽 삼면으로 곡장을 두르고, 그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봉분의 존재를 강조하였으며,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봉분을 수호하는 각 두 쌍의 석호, 석양을 세우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병풍석이나 난간석에 십이지상을 조각하거나 글씨로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연꽃, 모란 무늬 등을 새겨 아름답게 장식 하였다. 능침 공간은 가로 방향으로 장대석을 설치하여 3단계로 나누는데, 가장 위쪽은 선왕의 영혼이 깃든 상계이며, 그 아래 단(중계)은 문인의 공간, 맨 아래 단(하계)은 무인의 영역으로 표현되었다. 상계에는 곡장과 봉분, 석호 · 석양 · 혼유석과 망주석 등을 놓고, 중계에는 장명등과 문석인과 석마,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세웠다. 능침 공간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므로 성역시 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가마에서 내린 왕 또는 제관이 배위에서 사배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례가 시작된다. 왕과 제관들은 참도(신도와 어도)를 따라 제수가 진설된 정자각으로 이동한다. 정자각 주위에는 축문을 태우는 예감, 능을 지키고 제수를 준비하는 수복방과 수라간, 비각 등이 있다.

평소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왕릉 관리인(능참봉이 책임자)이 머무는 재실이 있으며, 전사청이 있다. 재실을 지나 속세와 성역의 경계가 되는 금천교를 건너면 제향 공간이 시작되는 홍살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풍수상 비보를 위해 마련한 연못인 지당(池塘)이나 왕릉군이 있는 곳에 능역의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조성하는 외홍살문 등이 세워지기도 한다.

                                               
 
 

1 곡장 : 왕릉을 보호하기 위하여 삼면으로 둘러놓은 담장
2 봉분 :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만든 무덤
3 석양 :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설치함
4 석호 : 능침을 지키는 호랑이 모양의 수호신. 석양과 함께 능침을 수호하는 의미로 밖을 지켜보는 형태로 설치함
5 혼유석 : 일반인의 묘에는 상석이라 하여 제물을 차려놓는 곳이지만, 왕릉은 정자각에서 제를 올리므로 혼령이 앉아 노는 곳이라 함
6 망주석 : 봉분 좌우측에 각 1주씩 세우는 기둥, 그 기능에 대해서는 육신에서 분리된 혼이 육신을 찾아들 때 멀리서 봉분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표시의 기능을 한다는 설,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기능을 한다는 설, 왕릉의 풍수적 생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있음
7 장명등 : 왕릉의 장생발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웠다. 조선 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정릉의 장명등은 사각지붕이었는데, 초기에는 팔각지붕이다가 숙종 명릉부터 다시 사각기붕으로 양식이 변함
8 문석인 : 장명등 좌우에 있으며, 언제든지 왕명에 복종한다는 자세로 양손으로 홀을 쥐고 서 있음
9 석마 : 문석인과 무석인은 각각 석마를 대동하고 있음
10 무석인 : 문인석 아랫단에 석마를 대동하고 있으며, 왕을 호위하고 왕이 위험에 처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한다는 뜻에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함
11 산신석 : 정자각 뒤 오른쪽, 보통 예감과 마주보는 위치에 설치한 것으로 장사 후 3년간 후토신(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됨
12 예감 : 정자각 뒤 서쪽에 제향 후 축문을 태우던 곳으로, 석함(石函)이라고 하며, 소대(소전대),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함.
13 비각 : 비석이나 신도비를 안치하는 곳. 신도비(神道碑)는 능 주인의 생전의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
14 정자각 :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황제는 일(日)자 모양으로 침전을 조성하고, 왕은 정(丁)자 모양의 정자각을 조성함. 정자각에 오를 때는 동쪽으로 오르고 내려올 때는 서쪽으로 내려옴
15 소전대 : 축문을 태우는 곳이었으나 조선 3대 태종 헌릉 이후로는 예감에 그 기능이 포함되면서 소전대는 생략되었다.
16 참도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폭 3미터 정도로 돌을 깔아놓은 길. 왼쪽의 약간 높은 곳은 신이 다니는 신도(神道)라 하며, 오른쪽의 임금이 다니는 길은 어도(御道)라고 하여 약간 낮음
17 수복방 : 능을 지키는 수복이 지내던 곳으로 정자각 동쪽에 지었음
18 수라방 : 제사 음식과 제물을 준비하던 장소
19 배위 : 홍살문 옆에 한 평 정도 돌을 깔아놓은 곳. 판위(板位), 어배석(御拜石), 망릉위(望陵位)라고도 함. 제향행사 등 의식 때 망릉례(제사를 지내러 왔음을 알리는 의식) 등을 행하는 곳
20 홍살문 : 홍살문은 능, 원, 사당 등의 앞에 세우며,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놓음. 홍문(紅門)또는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함
21 금천교 :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에 따라 물을 가로질러 놓은 다리

                                                             
                                                                
 
 
 

조선왕조는 1392년 탄생 이래 왕조의 문을 닫은 1910년까지 518년의 세월을 이어오면서 27대에 걸친 왕과 왕비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실 가족의 무덤을 신분에 따라 능(陵)ㆍ원(園)ㆍ묘(墓)로 구분하였는데,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왕의 자리에 오른 왕의 친부모)의 무덤을 ‘원’, 나머지 왕족의 무덤을 ‘묘’라 부른다. 능ㆍ원ㆍ묘에 관계된 조선 왕실의 무덤은 모두 119기로, 이 가운데 능이 42기, 원이 13기, 묘가 64기이다.

조선왕릉은 도성인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주변 능역과의 거리, 주변 산세, 관리의 목적 등에 따라 입지를 결정했다. 기본적으로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4킬로미터 밖 40킬로미터 이내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땅을 풍수적 길지(吉地)로서 능역으로 선정하였으며, 주변 산이나 지형지물 등을 이용하여 주변의 다른 시설물과 능역을 격리시킴으로써 능역이 신성한 공간임을 드러내왔다. 조선왕릉이 서울 근교의 풍부한 녹지 공간에 자리하여 현대인에게 도심 속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풍수사상과 시대상을 바탕으로 하여 왕릉의 입지가 결정되면, 성(聖)과 속(俗)의 위계적 질서를 반영한 유교 예법에 따라 능역의 공간을 구성하였다. 기본 묘제는 고려를 계승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능에서 치르는 각종 제례 절차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모습의 조선왕릉으로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상장례(喪葬禮)는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조선 왕실의 현실에 맞게 예법을 정리한 《세종실록 오례의》와 《국조오례의》를 따랐으며,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임시기구인 3도감을 설치하여 상장례를 담당케 했다. 3도감은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 시신을 임시 안치할 빈소의 설치와 매장을 준비하는 빈전도감(殯殿都監),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이다.

 

 

 
 

조선왕조의 제례는 위로는 왕릉에서부터 일반 사대부 및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거행한 의례였다. 무덤에서 치르는 제례는 사람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삶을 사는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의식이다.
조선왕조는 나라의 문을 열고 왕릉을 조성하기 시작한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나, 191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산릉제례를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이 소임을 맡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없는 산릉제례의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산릉제례로 인하여 조선왕릉은 단순한 건축적 기념물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살아 있는 전통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예조에서 제관을 선정 한다.
임금의 행렬이 궁궐을 나서서 산릉에 도착하는 행차 의식
제례 의식 전에 전사관과 능사가 제수를 진설하는 의식
임금이 제례를 행하기 위해 소여를 타고 홍살문 앞에 도착하는 의식
임금이 정자각의 판위에 서쪽을 향하여 서는 의식
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모든 제관이 네 번 절하는 의식
제관이 손을 씻고 정해진 위치에 나아가는 의식
제주를 따르는 것을 살펴보는 의식
초헌관이 첫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고 대축이 축문을 낭독하는 의식
축문을 읽는 의식
아헌관(영의정)이 둘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의식
종헌관(좌의정)이 셋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의식
신을 보내기 위하여 네 번 절하는 의식
제례에 쓰인 축문을 태우는 의식
임금의 행렬이 다시 궁궐로 돌아가는 행차 의식
전사관과 제관들이 제찬을 거두는 의식

 

왕릉관련기록

조선왕조는 국가에서 중요한 행사를 치르면 전 과정을 일일이 기록하여 책으로 남겨놓았다. ‘의궤’로 알려진 기록물이 그것이다. 국장을 치를 때에도 당연히 의궤로서 기록을 남겼다. 국장 관련 의궤는 상장례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인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 세곳에서 제작하였다. 이들 의궤는 나라에서 왕릉을 만들 때 어떤 의도로 터를 잡고 누가 왕릉 조성을 주관했으며 거기에 들어간 경비나 자재는 무엇이었고 국장이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났는지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으며, 때로는 상세한 그림까지 곁들여서 국장 행렬이나 왕릉이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의궤가 있기에, 장례의 절차가 아무리 복잡하고 까다로워도, 설령 왕릉 중 일부가 불의의 사고로 훼손되거나 본래 모습을 상실했다해도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 복구할 수 있었다.

의궤 외에 각 능에서는 능의 유래와 특징, 능 관리상의 주요 사항을 글로 정리한 ‘능지’를 제작해왔다. 이들 능지는 조선시대 왕릉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그밖에도 조선왕릉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국조오례의》등이 있다. 왕릉 조성과 관련된 이같이 많은 문헌 기록은 유례가 없어 조선왕릉의 문화적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자료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