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릉
![]() 능역은 크게 능침(성역) - 제향(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공간) - 진입(속세)의 세 공간으로 나뉜다. 풍수사상에 따라 능역 그 자체가 자연 환경의 일부라 생각되도록 조영하는 자연 친화적인 방식은 같은 동양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다. 능역의 크기나 봉분 조영 방식, 문 · 무석인 등의 석물과 기타 시설물 배치 등은 기본적으로 조선왕릉의 상설 제도(象設制渡)를 따랐으나 왕릉 조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가감과 변화가 적용되었다. ‘상설’은 ‘형상을 설치한다’는 뜻의 말로, 능역에 설치한 모든 시설물과 석물을 일컬으며, 이에 해당하는 배치 규범은 ‘상설 제도’라 한다. 능침 공간의 핵심이 되는 시설은 봉분이다. 봉분은 주변 산세와 지형에 따라 단릉 · 쌍릉 · 합장릉 · 삼연릉 · 동원이강릉 · 동원상하릉 등 다양한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왕릉 부분은 원형의 봉분 양옆과 뒤쪽 삼면으로 곡장을 두르고, 그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봉분의 존재를 강조하였으며,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봉분을 수호하는 각 두 쌍의 석호, 석양을 세우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병풍석이나 난간석에 십이지상을 조각하거나 글씨로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연꽃, 모란 무늬 등을 새겨 아름답게 장식 하였다. 능침 공간은 가로 방향으로 장대석을 설치하여 3단계로 나누는데, 가장 위쪽은 선왕의 영혼이 깃든 상계이며, 그 아래 단(중계)은 문인의 공간, 맨 아래 단(하계)은 무인의 영역으로 표현되었다. 상계에는 곡장과 봉분, 석호 · 석양 · 혼유석과 망주석 등을 놓고, 중계에는 장명등과 문석인과 석마,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세웠다. 능침 공간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므로 성역시 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가마에서 내린 왕 또는 제관이 배위에서 사배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례가 시작된다. 왕과 제관들은 참도(신도와 어도)를 따라 제수가 진설된 정자각으로 이동한다. 정자각 주위에는 축문을 태우는 예감, 능을 지키고 제수를 준비하는 수복방과 수라간, 비각 등이 있다. 평소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왕릉 관리인(능참봉이 책임자)이 머무는 재실이 있으며, 전사청이 있다. 재실을 지나 속세와 성역의 경계가 되는 금천교를 건너면 제향 공간이 시작되는 홍살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풍수상 비보를 위해 마련한 연못인 지당(池塘)이나 왕릉군이 있는 곳에 능역의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조성하는 외홍살문 등이 세워지기도 한다. ![]() 1 곡장 : 왕릉을 보호하기 위하여 삼면으로 둘러놓은 담장 ![]() ![]() 조선왕조는 1392년 탄생 이래 왕조의 문을 닫은 1910년까지 518년의 세월을 이어오면서 27대에 걸친 왕과 왕비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실 가족의 무덤을 신분에 따라 능(陵)ㆍ원(園)ㆍ묘(墓)로 구분하였는데,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왕의 자리에 오른 왕의 친부모)의 무덤을 ‘원’, 나머지 왕족의 무덤을 ‘묘’라 부른다. 능ㆍ원ㆍ묘에 관계된 조선 왕실의 무덤은 모두 119기로, 이 가운데 능이 42기, 원이 13기, 묘가 64기이다. 조선왕릉은 도성인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주변 능역과의 거리, 주변 산세, 관리의 목적 등에 따라 입지를 결정했다. 기본적으로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4킬로미터 밖 40킬로미터 이내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땅을 풍수적 길지(吉地)로서 능역으로 선정하였으며, 주변 산이나 지형지물 등을 이용하여 주변의 다른 시설물과 능역을 격리시킴으로써 능역이 신성한 공간임을 드러내왔다. 조선왕릉이 서울 근교의 풍부한 녹지 공간에 자리하여 현대인에게 도심 속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조선왕조의 제례는 위로는 왕릉에서부터 일반 사대부 및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거행한 의례였다. 무덤에서 치르는 제례는 사람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삶을 사는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의식이다.
왕릉관련기록조선왕조는 국가에서 중요한 행사를 치르면 전 과정을 일일이 기록하여 책으로 남겨놓았다. ‘의궤’로 알려진 기록물이 그것이다. 국장을 치를 때에도 당연히 의궤로서 기록을 남겼다. 국장 관련 의궤는 상장례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인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 세곳에서 제작하였다. 이들 의궤는 나라에서 왕릉을 만들 때 어떤 의도로 터를 잡고 누가 왕릉 조성을 주관했으며 거기에 들어간 경비나 자재는 무엇이었고 국장이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났는지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으며, 때로는 상세한 그림까지 곁들여서 국장 행렬이나 왕릉이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의궤가 있기에, 장례의 절차가 아무리 복잡하고 까다로워도, 설령 왕릉 중 일부가 불의의 사고로 훼손되거나 본래 모습을 상실했다해도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 복구할 수 있었다. 의궤 외에 각 능에서는 능의 유래와 특징, 능 관리상의 주요 사항을 글로 정리한 ‘능지’를 제작해왔다. 이들 능지는 조선시대 왕릉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그밖에도 조선왕릉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국조오례의》등이 있다. 왕릉 조성과 관련된 이같이 많은 문헌 기록은 유례가 없어 조선왕릉의 문화적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자료 : 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