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천년의 수인(囚人) / 이정림

concert1940 2010. 9. 24. 10:00

한 달 전에 우리는 전직 노대통령 한 분을 떠나보냈다. 누가 그분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별세한 첫 번째 대통령이라 한 말이 오래도록 여운을 던져준다. 그 말은 우리네 정치사에서 역대 대통령들이 그만큼 말년이 좋지 않았다는 뜻이지 않은가. 한때는 '국부(國父)'라고까지 추앙받던 초대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지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고,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겠다고 밤낮없이 '새마을노래'를 틀어대던 그 웃음기 없는 대통령은 부하의 총탄을 맞고 딸 같은 여자의 무릎에서 세상을 떴다.


왜 우리는 은퇴한 대통령이 보통 시민이 되어 골목길을 뒷짐지고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편안한 노후를 보내다가 어느 날 세상을 뜨게 되면, 그분이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목에 서서 '그 동안 나라 위해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두 손 모아 인사를 올리며 명복을 빌어 드리고 싶은데….  


 그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대통령들에 비하면, 비록 재임 기간이 10개월밖에 되지 못한 '비운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의 안방에서 편히 세상을 뜬 행운의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까 하는 의문이 지금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생전에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모습을 뵈면 이상하게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하였다. 그리고 그 굳은 표정에서는 그분만이 지니고 있을 어떤 알 수 없는 고독이 느껴지곤 했지 않은가.


대통령이 세상을 뜨자 사람들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먼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궁금증부터 드러내 보였다. 과연 '회고록'을 남겼을까 하는 그것이었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회고록은 한 개인의 삶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역사의 진실이 담겨 있으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갈 때마다 소용돌이 밖의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왜 그 소용돌이가 일어났을까. 누가 그 소용돌이를 일으켰을까. 그러나 그 진실은 적어도 소용돌이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고는 밝힐 수가 없다.


작고한 대통령은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생생히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그 소용돌이 때문에 다치고 쓰러지셨던 분이다. 자신을 쓰러뜨린 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은 미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간의 경우일 뿐이다. 적어도 공인이라면 결코 역사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누가 침묵을 미덕이라 했던가. 말하지 않아도 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미덕일 수 있지만,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비겁(卑怯)에 지나지 않음을 그분은 정녕 모르셨을까.  


그분에게는 역사의 진실을 밝힐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왜 입을 열지 않았을까. 아니, 왜 입을 열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분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허탈하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사람 역시 역사의 죄인이요 공범(共犯)이라는 사실이다.  


<천년의 수인(囚人)>이라는 연극이 있었다. '수인(囚人)'이라는 글자에서 상징되는 바와 같이 이 연극은 갇힌 자와 갇히지 않은 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세 사람으로, 겨레의 스승 김구 선생을 총살한 안두희와 비전향 장기수, 그리고 광주 학살의 병사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역사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 죄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생을 남몰래 죄의식 속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 죄의식이 곧 그들에게는 엄청난 고문이요 형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 비해 갇히지 않은 우리의 삶은 얼마나 자유롭고 떳떳하고 행복할까. 갇힌 자나 갇히지 않은 자나 모두 한 모습, 똑같은 피해자라는 것을 이 연극은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에게는 아직도 심판되지 않은 역사가 있다. 그리고 책임지지 않고 숨져간 죄인들이 많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그들을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후세들이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자성(自省)일 뿐이다.


고인은 이제 영원한 침묵 속에 누워 계신다. 그분이 끝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 무엇이 진정 있었다면, 그리고 그 무엇이라는 것이 혹여라도 떳떳치 못한 이유 때문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이승에서 그 침묵의 대가를 충분히 치르셨을 것만 같다.


이 땅에는 아직도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사람과, 그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워하는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 이 공존이 우리를 역사 앞에 모두 천년의 수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