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는 과연 항일의 노래인가?
<봉선화>’는 과연 항일의 노래인가?
-‘민족음악인’으로 알려진 홍난파에 관한 잘못된 신화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횡설수설]홍난파
▷홍난파는 국내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부인 이대형의 회고에 따르면 3·1운동이 일어나자 홍난파는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을 저당 잡히고 그 돈으로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찍어 배포했다. 그는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았으며, 옥고를 치를 때 얻은 늑막염이 도져 1941년 43세에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사망한 부인은 유언으로 “내 죽음을 알리지 말며, 특히 TV에 비밀로 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홍난파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면서 혹시라도 불씨가 커지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리라. 부인의 참담한 심정을 미뤄 짐작할 만하다.
▷음악인들이 ‘홍난파 변호’에 나섰다. 8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홍난파를 친일파 명단에 올린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지난주 서울 종로구 홍파동의 홍난파 옛집에서 추모음악회를 열었고 오늘은 세미나를 갖는다. 친일로 거론되는 인사를 옹호라도 하면 즉각 친일파로 몰리는 세태에서 음악인들이 전면에 나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난파를 사랑하는 음악인들은 이런 야만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치는 언제나 예술가들을 선전선동에 동원해 왔다. 식민지 통치에다 전쟁까지 겹친 시절의 상황을 후대(後代)의 느낌과 상상력으로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홍난파의 일생을 객관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앞뒤 사연을 듣고 아는 같은 음악인들이 아닐까.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시작한 역사 청산에서 홍난파의 처지가 노래 속의 ‘봉선화’ 같다. 슬픈 일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서울 종로구는 홍파동 2-16번지 홍난파 가옥을 9월 소공연장으로 개조해서 일반에 공개한다고 한다.
홍난파 가옥은 서울시 교육청을 지나 오른쪽 오르막길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1935년 4월부터 1941년 8월 홍난파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이 가옥은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상태로 민간 소유로 있다가 종로구가 2004년 서울시의 특별교부금 9억6000만원을 받아 매입했고 이번에 들어간 공사비는 모두 3억원이라고 한다.
한편 그의 고향으로 알려진 경기 화성시는 내년이 홍난파 탄생 110주년이라 하여 그에 대한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화성시 활초동 그의 생가로 알려진 주변을 단장해 번듯한 기념관을 지으려던 화성시는 그때마다 친일음악인에 대한 기념사업을 반대하는 시민들에 의해서 뜻을 이루지 못한 터지만 언제든 기회를 엿보고 있다. (화성시가 홍난파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며 호시탐탐 생가 성역화를 통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심정이야 이해는 가지만, 현재 홍난파 출생지는 서울이라는 주장과 화성이라는 주장이 맞서는 상황이기 때문에 화성시의 연고권 주장은 아직 성급하다)
사실 홍난파는 한국 근대음악계에 끼친 영향만큼이나 대표적인 친일음악인으로 평가되고는 있지만, 마흔 네 살 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고 <봉선화>와 <고향의 봄> 같은 애창곡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몇 가지 잘못 알려진 ‘신화’ 덕분에 그는‘친일음악인’보다는 ‘민족음악인’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면 먼저 그에 대한 신화들을 먼저 들어보자.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너 모습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봉선화>는 홍난파를 민족음악인이자 저항음악인이라는 신화를 만들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노래이다. 울 밑에 선 봉선화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일제치하에서 신음하는 식민지 조선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 이 곡은 홍난파가 1920년 <애수>라는 제목으로 만든 기악곡으로 후에 김형준이 이 곡에 가사를 붙인 것이 지금의 <봉선화>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이 곡은 식민지 조선인의 정서를 표현할 의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그러한 가사를 만든 김형준이 그러한 민족적 정서를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 논리적으로는 수긍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다.
<봉선화>와 관련된 또 다른 신화는 그 곡이 민족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킨다고 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금창곡’(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금지곡’이라고 하였다)으로 분류되어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봉선화>는 금창곡이기는커녕 오히려 총독부 당국에 의해 권장되던 곡으로 봐야 한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친일음악단체인 [경성후생실내악단]이 1942년 6월 11일 경성 부민관(오늘날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연 피로공연 프로그램 팜플렛을 보면 소프라노 김천애는 당시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려는 의도로 종군간호부를 주제로 만들어진 노래인 <애국의 꽃>(고세키 유지 작곡)을 먼저 부르고 바로 이어서 <봉선화>를 부르게 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주최하고 친일음악단체가 연주하는 행사에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을 달래려는 노래가 버젓이 불렸다는 것이 가능이나 한 일일까. 더욱이 1942년 당시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이던 매우 긴박한 시국임을 감안한다면 <봉선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성격의 노래가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눈 뜬 장님이 아니라면 말이다.
홍난파에 대한 잘못된 신화 중 가장 극적인 부분은 그의 죽음의 원인과 관련된 것이다. 즉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만들어진 [수양동우회]에 가담한 홍난파는 항일독립운동단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풀려난 뒤에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44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 또한 반은 맞지만 나머지 반은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1937년 6월 11일 홍난파는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고 그 해 8월 21일 석방된다. 그리고 바로 한 달 후인 9월 30일 부민관에서 [매일신보] 주최로 열린 애국가요대회에서 친일곡인 <정의의 개가>와 <공군의 가>를 작곡하면서 본격적인 친일로 돌아선다. 같은 해 11월 4일에는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요즘으로 말하면 서울지방검찰청)에 제출한다.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이 있는 필자는, 그 동기여하와 그 활동유무를 막론하고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민중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제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사상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금후는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친일로 돌아선 홍난파에게 돌아온 대가는 달콤했다. 바로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한 것이다. 또한 각종 친일단체에 주요 간부로 참여함과 동시에 주요 음악경연대회에 심사위원 그리고 방송을 통해 군국가요를 창작 보급하는 것으로 그는 인생의 후반기를 보내게 된다.
사상전향을 한 바로 그해 12월 홍난파는 내심 착잡했던 모양이다. 친일 월간지 [조광]에 발표한 <나의 1년 총결산, 정원의 실패>라는 짧은 글에서 자신의 정원에 심은 나무가 결국 말라 죽고 만 것을 언급하면서 끝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다. “금년은 나에게 그리 복된 해가 아니었습니다.”
즉 홍난파는 동우회 사건으로 약 70일 간 옥고를 치룬 것은 맞지만 그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문을 받은 사람이 석방과 동시에 당시 조선 최고의 악단인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한다거나 동시에 왕성한 대외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문 후유증에 의한 사망도 그를 영웅을 만들려는 조작된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사후에 그에게 헌사된 ‘민족음악인’이라는 이미지는 생전에 그의 글을 통해서 볼 때 홍난파 스스로도 결코 원치 않았을 터이다. 1931년 1월 29일부터 2월 1일까지 당시 [동아일보]에 <음악과 계급의식>이라는 제목으로 3회 연재한 글을 통해 ‘음악은 문학이나 미술과 달리 계급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음악을 가지고 거기에 계급의식이나 계급성을 억지로 붙인다 함은 하등의 의미도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음악은 그저 음악 그 자체라는 순수예술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말을 따른다면 <봉선화>나 <고향의 봄>같은 노래에 억지로 민족적 정서나 식민지 조선인들의 삶을 꿰맞춰 평가할 필요가 없어진다.
서울 종로구가 홍난파가 살던 가옥을 매입해 보존하겠다는 발상을 좋은 것이다. 어떻든 역사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홍난파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사실로 착각하는 장소로 그 가옥이 쓰여서는 안 된다.
확실한 것은 그 집에서 홍난파의 영욕의 작품들을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그에 대한 친일의 과오도 그곳에서 알고 가도록 작은 안내문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영욕의 짧은 생을 살다간 젊은 음악인을 추억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그가 만들어 낸 친일음악을 들으며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음의 전장으로 걸어간 이름 없는 젊은이들의 삶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안타깝기 때문이다.
홍난파가 1921년 작곡한 ‘봉선화’는 일제 치하 조선인의 애창곡이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며 민족의 처지를 슬퍼한다. 일제 탄압이 극심하던 1942년 4월 소프라노 김천애는 도쿄에서 열린 전(全)일본 신인음악회에 흰색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이 노래를 불렀다. 그 자리에 있던 조선인들은 눈물의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귀국한 김천애가 이 노래를 자주 부르자 일제는 ‘금지곡’으로 묶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