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음악이야기

리스트 후기생애

concert1940 2011. 4. 19. 10:47

로마에서의 8년
다음 8년 동안 리스트는 주로 로마에서 살면서 종교음악에 더욱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오라토리오 〈성녀 엘리사베트 전설 Die Legende von der heiligen Elisabeth〉·〈그리스도 Christus〉 등 여러 종교 소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감상적인 유형보다 표현이 좀더 직선적이고 감동적인 새로운 종류의 종교 음악을 작곡하고자 했다. 당시 작곡가로는 드물게 그레고리오 단성성가에 관심을 보였지만 성직자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그의 종교 음악은 대부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1862년 딸 블랑딘이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바흐의 칸타타 〈울어라, 슬퍼하라 Weinen, Klagen〉를 주제로 변주곡을 작곡했다. 리스트가 이 곡을 주제로 사용하게 된 것은 이 곡의 끝에 나오는 코랄 〈Was Gott tut das ist wohlgetan〉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864년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더이상 둘 사이에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1865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4개의 소품(小品:하급성직)을 받았지만 사제가 되지는 않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 요제프 1세 황제의 헝가리 왕 대관식을 위해 〈헝가리 대관식 미사 Hungarian Coronation〉를 작곡했고, 이것을 계기로 고국인 헝가리와의 유대를 새로 갖게 되었다. 그동안 19세에 리스트의 아끼는 제자 한스 폰 뷜로와 결혼했던 딸 코지마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코지마와 바그너 사이에는 사생아가 생겼고, 이때문에 리스트는 바그너와 줄곧 불편한 관계로 지내다가 1872년 화해했다.
만년
1869년 리스트는 대공의 초청으로 바이마르로 다시 돌아가 피아노 마스터 클래스를 맡았고, 2년 뒤 부다페스트에서도 같은 일을 요청받았다. 그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로마·바이마르·부다페스트를 오가면서 수업을 계속했다. 1872년 바그너와 화해한 후 정규적으로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석했다. 때로 피아니스트로서 자선 연주회에 그 모습을 나타내면서 작곡활동도 계속 했다. 만년의 작품들에는 클로드 드뷔시의 화성 양식의 특성이 나타나는데 그중 〈조성이 없는 바가텔 Bagatelle Without Tonality〉은 벨라 바르토크나 심지어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양식적 특성을 예견하고 있기도 하다.
1886년 리스트는 마지막으로 로마를 떠났다. 부다페스트·리에주·파리에서 열린 자신의 작품 연주회들에 참석했고, 이어서 45년 만에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했다. 런던에서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7개의 연주회가 열렸다. 이후 안트베르펜·파리·바이마르를 옮겨다녔고, 7월 19일 룩셈부르크에서 마지막으로 직접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2일 후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도착했다. 그는 몇 달 동안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고, 열이 높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지만, 바그너의 공연에 2번이나 참석했다. 병세는 급기야 폐렴으로 번졌고, 코지마는 냉정하게도 바이로이트 축제를 감독하기 위해 리스트를 혼자 남겨두고 가버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