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갈 곳이 있는 걸음

concert1940 2012. 4. 21. 17:27

 이른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 겨우 밀고 밀리며 올라타기는 했으나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 틈에 끼어 터미널 역에 내리니 이곳은 광활한 사람바다를 이루고 있다. 밀려가고 오는 인파에 실려 나는 그저 선 채로 가야 했다.

 

 이 많은 이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를 가는 것일까. 아침 시간이니 직장으로 가는 사람, 생업을 위해 시장이나 상점으로,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는 마치 군대 행렬처럼 박자와 리듬이 맞게 목적지를 향해 울린다.

 

 활기차고 힘이 있는가 하면 지척대는 걸음도 있다. 아침부터 힘없는 발소리는 무슨 까닭이 있는 걸까. 종종걸음을 치는 이도 있고 뛰는 이도 있다. 누구 한 사람 이야기를 하거나 잡담을 하는 이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해 발걸음만 재촉한다.

 

 그들과 함께 바쁘게 걷는다. 이따금씩 뛰기도 한다. 순간 피식 웃음을 흘린다.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다가는 무리들에게 밀리기 때문에 그저 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나도 그들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종종걸음을 옮기면서 동조해야 한다. 이것이 곧 군중과의 조화다.

 

 어렸을 적 어머니께 몹시 꾸중을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확실히 기억이 없으나 어찌 섭섭하고 원망스럽던지 무작정 집에서 뛰쳐나왔다. 갈 데가 있을 리 없는 아이는 도림동 둑으로 올라갔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한참 걷다보니 땅거미가 내려 어둑해졌다. 참고 있던 서러움이 터지고 별안간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작은 가슴에 오기를 품고 집을 나온 아이는 방향과 목적도 없이,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고 있었기에 두려움은 더욱 컸다. 아이는 뒤로 돌아서 오던 길로 다시 걸었다.

 

 찬바람에 뺨이 얼어붙는 듯했다. 작은 발로 둑길을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방향을 정하고 가족이 기다리는 길을 달리기에 두려움도 슬픔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저만치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시며 두 팔을 벌리고 서 계셨다.

 

 목적 없이 어디론가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괴로운 일에 시달릴 때는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시 잠깐은 신선하고 새로운 기분에 젖어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허전한 마음에서 헤어나기가 어렵다. 낯선 곳에서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는 방황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삶의 활력을 부어주는 것이다. 갈 곳 없이 거리를 헤매는 일이 힘들고 고독한 일임을 터득한 어린 시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무엇이든 할 일이 있으며 가야 할 이유가 있고, 자신을 기다리는 일과 돌아갈 곳이 주어진 것은 크나큰 감사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면서 열차를 갈아타는 곳까지 왔다. 전쟁터를 지나 온 느낌이다. 온 몸이 조금씩 쑤시고 피곤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상쾌하다. 힘 있는 발자국소리와 자신의 삶을 가꾸기 위해 바쁜 발걸음을 만났기에.

 

 갈 곳이 있는 걸음에는 희망이 얹혀 있다. 피곤할지라도 쉴 곳이 있고 혼을 바쳐 일할 수 있는 곳이 있기에 걸음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행간을 띈 것은 읽기 쉽게 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