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음악원 부총장으로 취임하는 허승연
취리히음악원 부총장 취임하는 피아니스트 허승연 “콩쿠르 우승보다 자신의 음악 해석이 중요”
ㆍ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공연 전 ‘세월호 참사’ 한국말 추도사 이어 바흐 곡으로 조의
“중요한 것은 연주에 자신의 견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피아니스트 허승연(48·사진)이 스위스의 유서 깊은 음악학교인 취리히음악원 부총장이 된다. 지난달 29일 만난 그는 “8월부터 임기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140년의 역사를 지닌 이 음악원은 스위스에서 가장 손꼽히는 음악학교다. 허승연은 1996년 이곳 교수로 부임한 이래, 부학장과 학장을 거쳐 마침내 종신직 부총장의 중책을 맡았다.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음악교육자로서 한국의 제도권 음악교육을 이렇게 바라봤다.
“한국에서 배운 학생들은 기교가 매우 뛰어납니다. 하지만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해요. 자신의 의견과 음악적 색깔에 대한 고민이 강렬하지 않은 거죠. 그런 부족함이 연주로 다 드러납니다. 물론 학생들의 잘못은 아니죠. 교육 시스템의 문제,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의 문제 같기도 해요.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자신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필요해요. 남을 동경하거나 남의 것을 흉내내면 안되죠.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그것입니다.”

▲ 교향악축제 협연 위해 내한… 학생들에 “음악은 사랑하듯”
공연에선 ‘세월호 추도’ 주문… 내년 한국팬에 슈베르트 선사
스위스에서 18년째 학생들을 가르쳐온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거요? 그게 뭐 중요한가요. 우승 해도 사장되는 연주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자신만의 음악을 끌어내지 못하면 그렇게 되죠. 시험공부 하듯이 음악을 공부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에 빠진 마음으로 음악을 공부해야 좋은 연주자가 될 수 있어요.”
허승연은 지난달 17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교향악 축제에 맞춰 귀국했다. 그는 코리안심포니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협연했다. 이번 방한에는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호른 수석인 남편 미샤 그로일도 동행했다. 이 오케스트라의 첫번째 내한 연주회는 2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그날의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노장 지휘자 데이비드 진먼(78)은 포디엄에 올랐지만 곧바로 지휘봉을 들지 않았다. 대신 검은 옷을 입은 미샤 그로일이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서툰 발음의 한국어로 A4 용지에 적힌 글을 더듬더듬 읽어가기 시작했다.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로 숨진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추도사였다. 짤막하고 형식적인 추도사가 아니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스위스인이 읽기에는 매우 긴 추도사였다. 톤할레 오케스트라는 이어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중에 ‘에어’를 추도곡으로 연주하고 묵념으로 조의를 표했다. 그 모든 것을 주문한 이는 허승연이었다. “사실 남편은 한국말을 할 줄 모르죠. 하루 종일 그 추도사를 읽고 또 읽으면서 연습했어요.”
피아니스트로서 허승연의 활동은 1998년부터 4년간 이어졌던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 연주, 2006년에 집중했던 리스트의 <순례의 해> 1·2·3집으로 기억된다. 그는 한 작곡가의 작품에 일정 기간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요즘 화두는 슈베르트라고 했다. 특히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 세 곡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가방을 열더니 최근 독일 음반사 ‘아쿠스티카’에서 발매한 슈베르트 소나타집을 꺼내 건넸다. ‘19번 D.958’과 ‘21번 D.960’을 수록한 음반이다. 그는 “20번은 아직 레코딩을 못했다”면서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세 명의 작곡가에게 매달렸어요. 모차르트의 소나타는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는 음악이죠. 리스트의 <순례의 해>는 인간적인 갈등, 내면의 콤플렉스를 느끼게 해요. 그 음악을 연주하면서 저도 많이 성숙해졌죠. 하지만 지금 연주하고 있는 슈베르트가 가장 마음을 끌어당겨요.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죠. 슈베르트를 연주하면서 겸손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그의 음악을 연주하려면 마음을 비우는 것이 우선이거든요. 내년 초에 한국에서도 슈베르트의 소나타 세 곡을 모두 연주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