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향나무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이 두렵습니다. 내가 서 있는 양 갈래 길로 주차장처럼 빽빽이 차들이 줄을 서 있거든요. 저마다 뱉어내는 개스가 내 얼굴이며 몸에 뒤덮습니다. 800년을 넘게 살고 있는 몸을 지탱하기에 너무 힘이 듭니다. 이곳은 서초동 옛 꽃마을이 있던 곳이에요. 동서남북에 온통 꽃냄새가 날라 다니는, 늘 푸르러 공기가 맑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답니다.
서초동(瑞草洞)은 옛부터 서리풀이 무성해 '상초리(霜草里)' 또는 '서리'라 불렸던 마을입니다. 이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상진(尙震) 선생이 있고, 상 선생은 조선시대의 4대 정승에 추앙될 만큼 인품이 뛰어나고 청백리(淸白吏)로도 유명한 분이었답니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일들을 겪고 보았습니다. 멀리는 관악산이, 가깝게는 우면 산이 병풍처럼 싸고 있는 서초동은 풍수 지리적으로도 명당이랍니다. 이 한 곳에서 이토록 오래 살고 있는 걸 보면 그럴 법도 하죠.
세월이 흐르니 모든 것은 변화되고 옛 꽃마을로 불리던 이곳은 자동차 천국 매연천국이 되었어요. 서울시가 나를 보호수로 지정 해놓고 관리를 한다지만, 반갑지 않아요. 나는 하루 종일 시커먼 연기를 마시고 죽어가고 있으니까. 맑은 시내가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공기 맑은 곳이 그리워요. 어느 때는 이제 그만 살았으면 싶거든요. 내 몸에 링거를 꽂아놓고 나를 보호한다지만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어요. 마치 서초동 네거리 교통순경처럼 그렇게 서 있을 뿐인데.
내 모습은 푸른 기를 잃어버렸어요. 매연에 찌들어 검푸른 색으로 변해버렸지요. 폭우가 쏟아질 때면 내 몸에 때를 벗고 싶어 안간힘을 써보지만 너무 찌들고 배어서 씻겨 지지 않는군요. 내가 뽐내며 살던 그 옛날 꽃동네 사람들은 순하고 어질었지요. 여름이면 내 그늘 밑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덕담을 나누고 매미며 여치의 한 곡조에 맞춰 흥을 내던 한량들. 그때 그 시절 평화가 다 어디로 갔을꼬.
나는 나날이 쇠잔해 가는데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게 슬픕니다.
이제 점점 흉측하게 변해 갈 내 모습이 보이는 듯해요. 그래서 안타깝고 괴로워요. 이따금 사진에 담는 젊은이들이 왔다 가면 좋은 일이 있을까 기다려집니다. 내 사진을 어디엔가 실어 나를 살려 주려는 사람들이 있을까 해서죠.
노구이지만, 더 얼마나 살아갈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만이나마 내가 살고 싶은 곳에 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세월을 홀로 살아와 바랄 것은 없으나 고고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고 싶습니다. 매연에 찌든 늙은 나무로 인지되는 게 슬프거든요.
보호수로 명명되기보다는 잡목이어도 청청한 산속에 서 있고 싶어요.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도, 산인들이 함부로 등을 들이대고 부딪고 괴롭혀도 그런 곳에 가 있고 싶어요. 가을, 오색단풍이 든 나무들 사이에 서서 홀로 푸름 을 자랑 하며 새들과 노닐며 자신감을 느끼는 나무가 되고 싶어요. 내가 서 있는 지금 이곳은 지옥의 통로입니다.
내 슬퍼하는 마음속 말을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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