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수필]월급 날/함순자

concert1940 2007. 6. 18. 17:59

아침이면 서둘러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는 일상이 갑자기 정지되었을 때 허탈해하는 남편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자고 새고 집안에서 부닥치며 지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 이러고 지내야 하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불편함을 이겨 내야겠는데 막막했다.

 

 모든 것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늦잠 한 번 실컷 자 봤으면 하던 소원도 길어야 한나절이었다. 그토록 훌훌 털고 떠나고 싶다던 여행도 한 달이면 지루하고 고달프기만 했다. 때맞춰 밖은 한창 봄인데 우리 집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진 남편의 방이 조용해도 걱정이고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도 가슴이 저렸다. 한숨 소리라도 새어나오는가 엿듣는 버릇도 생겼다. 한 가지 일밖에 모르는 외길을 살아온 사람한테 어떤 위로의 말을 하면 힘이 될 수 있을지 내게는 풀 수 없는 숙제였다.

 

 무엇보다 일이 없는 남자들은, 지갑이 비면 기(氣)가 죽고 지갑이 두둑해야 기가 산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얼마큼의 용돈이면 체면 유지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전에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무거운 짐이 가슴을 눌렀다. 지금까지 내게 주기만 했지 달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쉬고 있는 처지에 아내에게 손 내밀기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지금껏 나는 월급을 봉투째 독차지하고 출납은 내 권한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생각대로 해 왔다. 현직에 있을 때나 쉬고 있는 지금이나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매월 일정액이 들어온다. 다만 그 때는 월급이고 지금은 연금이라는 명목만 다를 뿐이다.

 

 연금이 들어오는 통장을 남편이 관리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가족을 부양한다는 자부심과 소득이 있음을 확인 시켜줌으로써 쉬고 있다는 압박감에서 조금은 풀려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통장을 남편 손에 넘겼다. 

 

 나의 전략은 성공이었다. 남편은 차츰 뜻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도 하고 집안에 필요한 것은 나와 같이 다니며 이것저것 사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25일이 되면 “월급날인데 외식하면 좋겠네요?” 하고 말을 건네면 좋은 기분으로 받아 주었다. 남편은 나에게 베풀어서 좋고 나는 대접받으니 좋았다. 

 

 평정을 찾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 갔다. 염려했던 힘든 굽이를 잘 넘긴 것 같아서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새로운 일을 계획하느라 분주하고 걸음도 활기차 보였다. 가끔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책도 사다 주고 집에 있는 시간 보다 밖에 나가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에 시달리며 고단했던 모습보다 지금이 아주 보기 좋다는 말도 자주 들려주었다.

 

  80년대까지는 봉급을 현금이 들어 있는 봉투로 받았다. 매달 20일 저녁이면 내 손에 쥐어 주는 노란 봉투를 가볍게 한 손으로 받은 기억이 없다. 그것은 우리 식구가 한 달을 살아야 하는 생명 같은 급료였다. 늦은 시간까지 크고 작은 일에 묻혀서 고되게 일한 대가였고 아랫사람이나 윗사람과의 인간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들, 경쟁사회에서 겪는 승진에 대한 초조함, 일에 대한 스트레스, 이 모든 것이 봉투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내 손에 들어올 때 그의 고달픔을 감싸안듯이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아 가슴에 안았다.

 

그러기에 받을 때마다 미안하고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한 마디로 묶어 “한 달 동안 잘 쓸게요.” 하고 말하는 것이 내 마음을 다한 표시였다. 내 말에 늘 돌아오는 대답은 “적어서 미안해.”였다. 그런 남편은 월급에서 한 푼도 축을 낸 적 없이 내 손에 쥐어 주는 모범가장이었다. 받아 든 월급 봉투를 베개 밑에 넣고 하룻밤을 자고 나면 지폐가 다림질한 것처럼 차분해졌다. 그것은 월급에 대한 내 경의의 표시였다.

 

 80년 중반부터였을까, 공무원에게 일 년이면 네다섯 번 상여금이 주어졌다.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만기된 적금을 탄 것 같다고 했을 때 없는 셈치고 옷도 사 입고 구두도 사라고 하는 남편의 말에, 없는 셈치고 저축하자고 대답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급 방식이 바뀌어 월급이 은행 통장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20일이면 주고받던 따뜻한 대화는 줄어졌지만, 상여금을 받음으로써 조금씩 저축하는 여유가 생겼다. 또한 작은 것을 계획하는 기쁨도 있었다. 

 30년 넘게 누려왔던 경제권이 끊겨 이제는 빈손의 주부가 된 줄 알았는데, 필요한 만큼의 수입이 정해진 날에 어김없이 들어온다. 우리 아이들은 의논이라도 했는지 광야에 내렸던 만나가 일용할 양식이 되었던 것처럼 매월 내 통장을 채워 놓는다.

 

 그동안 형편에 맞게 살다 보니 내 손은 늘 여리고 약했다. 그런 내 손끝에서 부서지지 않고 곱게 자라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우리 아이들, 가르쳐 주지도 않았건만 큰 욕심 없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가정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머니께 보답은 못 하지만 사랑의 표시만은 할 수 있어서···.”라고 하는 아이들의 정성에, 만년월급쟁이가 되어 그 날처럼 고마움과 감사를 담은 넉넉한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간다. 

※만나 : 광야생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내린 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