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갓길에 서서

concert1940 2007. 9. 21. 19:23
갓길에 서서/홍유경

바람이 분다. 고속도로를 휩쓸고 올라오는 위력이 대단하다. 도로의 먼지를 휘몰아 춤을 추는 남동풍의 소용돌이다.

갓길에 여러 대의 차가 쉬고 있다. 운전자가 잠시 피로를 씻기 위해 눈을 부치기도 하고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모습이 보인다. 새벽부터 먼 길을 운전해 온 트럭운전자들의 피로가 엄청난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에 잠깐의 휴식은 청량제가 되는 것 같다.

하이웨이를 달리거나 시내에서 운전을 할 때 나는 언제나 음악을 듣는다.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지루함을 참을 수 있어서 좋다. 교통체증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은 더 없이 평온하다. 이럴 때 잠깐이라도 쉴 수 있는 갓길이 없다면어떠할까.

한동안 집을 떠나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어찌 그리 길고 여유로운지,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체험해보지 못했던 다른 세계를 경험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하고 싶었던 것과 보고 싶었던 것, 가고 싶은 곳을 어느 누구에게도 제제 받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가족의 얼굴도 감감해지고 내 뇌리는 점점 하얗게 바래저가고 있는 듯하다. 수십 년만의 귀한 시간을 헛되게 보내게 될까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고속도로 갓길에 서 있는 자동차처럼 그렇게 비켜서서 지냈다. 조금은 한가롭고 편안한 마음이지만 늘 홀로이지만 행복하다. 언제나 주위에 사람들로 북적이며 지냈던 나날들로 해서 이렇듯 호젓함이 더욱 소중한 것 같다.

내 옆 사람 앞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긴장하며 사는 삶에서 헤어나 자유 함을 만끽하는 생활을 동경해 온 긴 세월이었다. 창공으로 비상하는 새를 부러워했던 30대에 나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겨우내 옷을 벗고 서 있는 나목이 되어 그렇게 나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많은 이야기가 필요 없고 표정조차 다스리지 않아도 좋다. 그저 묵묵히 홀로 세상을 구경하며 서 있고 싶었을 뿐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내리면 맞고 폭풍우가 몰아치면 한바탕 몸부림치며 통곡하면 되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을 피하고 싶어졌다. 어느 사람은 그런 증세가 정신적으로 피폐되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옷을 차려입고 표정 관리를 하며 미소로 대해야하는 대외적 행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외교적 발언을 해야 하고 가장 우아함을 내세워 관계유지를 위해 촉각을 곤두세워야하는 시간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세상사는 게 다 그래하면서 해 왔던 일들, 이제는 다 벗어버리고 나목처럼 되고 싶다. 갓길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썰물처럼 내 정신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저 무기력한 몸을 맡긴 채 어딘지도 모르고 날아다니는 바람처럼.

어느 해인가 싱가폴 크루즈를 한 적이 있었다. 둘째가 스위스 여행사를 통해 주선을 하여 여행객이 모두 스위스인들 이었다. 여유로움과 안정된 표정이 나를 압도하는 듯한 그들과 매일 저녁만찬에 이어 칵텔 파티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한국 사람은 우리 내외뿐으로 특별한 예우를 극진히 받았다. 그들은 거의 일선에서 물러나 쉬는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처지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그 긍지가 대단했다.

삶의 설계를 향해 질주만을 해야 했던 젊은 시절. 고통과 좌절, 때로는 절망의 늪으로 빠지기도 했던 그 때의 자화상을 돌이켜보며 노년의 여유로움은 금보다 귀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마음가운데 각자 자신의 갓길을 만들어 놓고 인생의 끝 페이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갓길에 서서 한유를 만끽하는 모습은 나의 고정된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정년퇴직의 쓸쓸함과 소외감을 느끼며 자신을 비하시키는 우리네의 노년기를 떠올려 보면서.

빼곡히 들어선 주차장의 차들 속에서 빠져나와 은행잎이 날리고 가로수가 내려앉는 아름다운 길을 홀로 달려본다.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차 안에서 오롯이 나만의 세계를 지배하는 기분이 이렇듯 좋을 수 있다니. 차창사이로 솔잎냄새가 스며드는 숲길은 내 미지의 공간이다. 갓길에 홀로 서보니 우주가 다 내 것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