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새벽 향기

concert1940 2008. 1. 14. 19:42
새벽 5시, 어둠이 걷히지 않은 하늘은 금새 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칠흙이다. 외투를 여미며 걸음을 재촉한다. 새벽예배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 그 상쾌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길거리에는 산으로 가는 사람들과 수북이 쌓인 낙엽을 쓸어 모으는 미화원, 새벽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자동차들, 모두가 아침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모습들이다.

언제부터인가 하루가 짧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반이 끝나고 남편이 출근한 후라야 내 시간이 시작되는데, 정오가 가까우니 하루의 반이 날아가 버린다. 운동도 해야 하고 컴퓨터 앞에도 앉아야하고, 할일은 많은데 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새벽부터 깨어 이 시간까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이 그저 서성거린 시간이 몇 시간째이니 조바심만 난다. 시간을 아끼며 하루를 설계하는 것도 삶의 지혜인 것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벽 그림은 다양하다. 상큼한 나무냄새, 꽃 냄새날아와 내 정신세계로 파고든다. 라벤더나 캐머마일 향이 따를 수 없는 새벽향기, 바람 냄새, 풀잎냄새 산 냄새, 바로 이 냄새를 어느 향수가 대신하겠는가. 투명한 하늘을 가슴에 담고 낙엽을 밟으면 사각사각 부서지는 신음소리에도 향은 날아다닌다.

얼마 전 설악산 산사를 찾았다. 마침 10월 중순 이후여서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어 아름다웠다. 사찰 처마 끝 풍경소리에 가을이 흠씬 묻어나고 절을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은 무아지경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띄엄띄엄 뭉게구름 속에 수즙은 듯 산봉우리가 숨어있다. 단풍이 절경인 한계령의 고독을 보았다. 찾는 이 없는 젊은 날의 기억을 더듬어 부단히 참고 기다린 산. 여인의 풍만한 가슴 같은 산자락에 오색 옷을 입고 깊은 한을 쏟아내는 첩첩산기, 구릉마다 구겨진 마음을 달래며 서 있는 나무들이 그날따라 장엄해 보였다.

곳곳에 단풍객이 줄을 잇고 있었다. 한계령 굽이굽이 휘도는 바람결에 거대한 수채화가 펼쳐져 장관이었다. 이른 새벽을 타고 찾아갔던 산사의 범종소리, 풍경소리,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주지승의 새벽염불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모두 하루를 여는 모습들이다.
삶을 가꾸어가는 이런저런 모습이 있다. 이른 시간 지하철에서, 새벽시장에서 만나는 삶의 향기는 숙연한 마음을 들게 한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새벽인 들이다.

새벽향기 같은 사람을 보았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산으로 가는 사람. 이슬방울 맺힌 풀잎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에 고마워 눈시울을 적신다고 했다. 영양이 모자라 휘어진 나무를 안타까워하고, 다른 이를 위해 발에 채이는 돌을 옮기고 죽은 나뭇가지를 치웠다. 다람쥐, 들 토끼의 먹이를 들고 다니며 산 초입에 텃밭을 일궈 여러 채소를 심었다. 산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의 먹이라고 했다. 그가 지나간 곳에는 그의 향기가 흩날렸다.

새벽향기는 심안의 냄새다.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사람에게서 풍기는 향이 그것이다. 고뇌를 기쁨으로 승화시킨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다.
어둠을 쫒고 여명을 재촉하는 새벽향기, 이 향기에 실려 새날을 맞이하고 싶다.

'문학의 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그분들이 다녀 갔나보다  (0) 2008.01.26
첫 아이/강은주  (0) 2008.01.21
새 얼굴의 지체  (0) 2008.01.14
꿈을 향하여  (0) 2008.01.09
도화지 속 세상  (0) 2008.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