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음악이야기

천재 소년 모차르트의 유럽여행과 그의 질병

concert1940 2009. 5. 10. 16:21
천재 소년 모차르트의 유럽여행과 그의 질병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전 세계적으로 모차르트의 인생과 음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모차르트는 역사상 가장 천재적이며 인기 있는 작곡가였다. 많은 사람들은 베토벤을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뽑지만 그의 음악을 하루 종일 즐겨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음악은 언제나 어디서 들어도 우리를 즐겁고 상쾌하게 해준다. 그의 음반이 클래식 음악의 장르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의 부친 레오폴트(1719-1789)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교사였으며 잘츠부르크 궁전의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그의 아들과 딸 난넬의 음악 인생을 위해 자신의 음악생애를 희생한 사람이다.

난넬의 회고록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며 놀기를 좋아했고 5살이 채 되기도 전에 스케르초와 미뉴에트 곡들을 단 30분에 습득 했으며 6살 때는 최초의 미뉴에트를 작곡하는가 하면 9살 때는 심포니를 처음으로 작곡하였고 12살에는 최초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일찍이 아들의 천재성을 깨달은 아버지는 작은 잘츠부르크의 경계를 넘어 전 유럽에 모차르트를 알릴 목적으로 1762년 9월에 다뉴브 강을 통해 비엔나로 가는 도중 린쯔에서 대중을 상대로 첫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을 본 오스트로 헝가리 제국의 재무장관은 황제 요셉 2세에게 이 천재적인 두 아이 들의 소식을 전한다. 비엔나 부두에 도착한 후 통관절차가 지연되자 여섯 살의 모차르트는 바이올린을 꺼내 즉흥적으로 미뉴에트를 연주하였고 이것에 감탄한 세관직원은 즉시 통관절차를 끝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해 10월 모차르트 남매는 궁전에서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난 후 모차르트는 황후의 무릎위에 올라앉아 황후의 목을 껴안고 마음껏 키스를 해주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갑자기 이 두 아이는 비엔나의 천재 명사가 되었고 귀족들로부터 콘서트를 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으며 하루에도 두 번씩 연주를 했다. 물론 아버지는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때 모차르트는 열과 반점을 동반하는 성홍열(scarlet fever) 또는 결절성 홍반(erythema nodosum)에 걸리는데 이 병이 29년 후에 사망을 초래하는 명의 시작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12월 31일 모차르트 일가는 그동안 벌었던 돈으로 새 마차를 구입하고 5일 후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이때 모차르트는 다시 류마티스열에 걸리며 관절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며 1주일간 누워있었는데 이 병은 류마티스열병(rheumatic fever)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모차르트는 비엔나궁전을 방문 중 프랑스대사로부터 베르사유궁전을 방문해달라는 초청을 받은 일이 있다. 그리하여 모차르트 일가는 1763년 6월 9일 파리를 향해 긴 여정을 떠나고 드디어 11월 18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이 여행 중 모차르트는 뮌헨과 만하임 등 여러 도시의 궁전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모차르트는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파리에서 11살의 난넬과 7살이 채 안된 모차르트의 연주를 보고 신문은 이 둘을 신동이라고 극찬하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모차르트 일가는 베르사유궁전에서 2주간을 보냈으며 루이 15세와 여왕은 모차르트를 신년 만찬에 초대하였다. 그해 2월에 모차르트는 편도선염에 걸리는데 류마티스열병에 다시 한 번 걸린 것으로 보인다. 이때 모차르트는 합시코드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여 루이 15세의 딸에게 증정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첫 출판된 작곡이었다.

1764년 4월 10일 레오폴트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자 도시이자 음악적으로 활발했던 런던으로 출발한다. 모차르트는 곧 조지 3세 왕과 여왕 샤롯 앞에서 연주를 하고 그들과 친해졌다. 이때 레오폴트는 병환에 시달리게 되고 일시 연주활동이 중단되자 이 틈을 타서 모차르트는 ‘무언가를 하기위해’ 첫 심포니를 작곡하였으며 모차르트는 런던에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를 만났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나이를 1년 낮추어서 홍보하고 입장료도 대폭 줄었지만 관객들이 계속 감소하자 모차르트 일가는 1765년 7월 네덜란드로 출발하여 9월 10일에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 두 어린이들은 왕자와 공주 앞에서 연주가 계획되었으나 난넬이 장티푸스에 걸려 모차르트 혼자서 공연을 하고 곧 모차르트도 같은 병으로 사경을 해매였다.

이 유럽여행을 떠난 지 3년 후인 1766년 1월 26일 부모와 두 자녀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하고 그 후 그들은 다시 파리로 갔다. 그 후 세 식구는 취리히와 뮌헨을 거쳐 잘츠부르크로 돌아온다. 이 긴 여행은 3년 반이 걸렸으나 1767년 그들은 다시 비엔나로 가며 이 여행 중 모차르트는 천연두에 걸려 체코로 피신하게 되고 이곳에서 11살에 심포니 6번을 작곡하였다.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그들은 1769-1773년 사이에 이태리로 세 번 여행을 가고 그의 오페라 3편이 모두 밀란에서 공연되었다. 이 여행도중 바티칸의 시스틴채플에서 단 한번들은 미제레레 전곡을 거의 틀림없이 악보에 옮겨 썼다는 전설적인 해프닝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때 모차르트의 어머니는 아들과 남편을 따라 여행하기를 원했지만 잦은 출산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1778년에는 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아들과 둘이서 파리에 갔으며 거기서 모차르트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프랑스말을 못하는 어머니는 외롭게 혼자 지내다가 병에 걸려 사혈을 받았고 객지에서 사망하였다.

그동안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전 오케스트라의 악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그의 돌발적인 언행이 문제가 되어 그를 고용했던 왕자 주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1781년에 모차르트를 해고했다. 그 후 그는 10년간 비엔나에서 고용인이 아닌 독립적 작곡가로서 활동하였다.

1782년 그는 모차르트에게는 스승이자 최고의 매니저였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콘스탄체(Constanze)와 결혼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며 1791년 모차르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천재임에는 틀림없지만 레오폴트 같은 유능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철통같이 엄한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