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트르 차이코프스키(Pyotr Tchaikovsky, 1840-1893년)의 여인과 그의 인생
차이코프스키의 가족(1848년) 좌서 우로 피오트르, 아렉잔드리아(어머니), 알렉잔드리아(누이동생), 일리아(아버지)
차이코프스키는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흔히 위대한 남자 뒤에는 위대한 여자가 있다고 하지만 동성연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 뒤에 위대한 여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여자는 있었다. 그리고 동성연애로서 받은 고뇌와 갈등이 그의 음악을 더 감동스럽게 만든 것은 아닌지? 라고 생각하게 된다.
피오트르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에 우랄산맥에 있는 지방도시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광산기술자 출신으로서 큰 광산의 감독관/책임자가 되어 부유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으나 음악에 대한 특별한 재능과 관심은 없었다. 그의 첫 부인이 사망한 후 피오트르의 어머니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녀의 가족은 프랑스로부터 이민 온 개신교 신도였다. 그 당시 러시아의 부유층은 대리모(governess)를 두었는데 이 대리모는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명의 자녀를 낳고 10명을 성인으로 키운 어머니는 피오트르가 4세가 된 1844년에 22살의 파니 뒤르바흐를 대리모로 고용하여 같은 집에서 살게 하였다. 파니 역시 프랑스계의 스위스 사람이였다. 그리하여 피오트르는 순수한 러시아적 가족 분위기 보다는 프랑스식 서방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자라났으며 이것이 후일 그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많은 자녀를 출산하고 키우느라 바빴던 어머니는 피오트르가 원하는 만큼 충분한 시간과 사랑을 주지 못했을 것이며 피오트르는 이 대리모가 나타나자 그녀의 치맛자락을 떠날 줄 몰랐다.
피오트르는 영리한 아이였으며 6살 때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까지 유창하게 읽고 썼으며 독일어까지 배웠다. 그러나 파니에 의하면 피오트르는 아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아이였으며 잘 깨진다는 뜻으로 “도자기 아이”로 불렀다. 피오트르는 피아노와 놀기를 좋아했으며 5살 때 처음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아마추어 출신의 피아노 선생보다 악보를 더 잘 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음악은 항상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떠나지를 않는다.”고 불평을 하기도 했다.
피오트르는 파니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지만 그가 8살이 된 1848년에 그의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가자 파니와 작별을 하게 되고 이것은 크나큰 충격이 되었다.
그가 10살 때 그의 부모는 다시 지방에 살면서 피오트르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대학) 준비학교에 입학시켰으며 그는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피오트르가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던 어머니가 14세 때 콜레라로 타계하자 다시 한 번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으며 그 후 곧 작곡을 시작하였는데 후일에 그는 “그때 나에게 음악이 없었다면 나는 미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자백 하였다.
피오트르는 19살에 법률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미 학생시절에 동성연애를 경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학생시절에 피아노 레슨을 받고 로시니와 베르디의 모차르트 오페라를 자주 보았지만 음악공부를 제대로 하지는 못하였으며 졸업 후 법무부의 하급공무원으로 취직 하였다. 그러나 피오트르는 공무원 생활에 행복하지 않았으며 21살에 음악 강의를 듣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23세에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안톤 루빈스틴이 설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25살에 졸업하였으며 26살에 졸업 작품으로 심포니 1번을 발표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민요를 자기의 음악에 인용하는 등 러시아에 그 뿌리를 두었다고 주장했지만 전통적 러시아 음악을 고수한 러시아 민족음악 5인방(보로딘, 쿠이, 발라키레프,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독일과 프랑스 등 서방세계의 음악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거리감을 두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와 그가 무척 따랐던 대리모까지도 사실상 프랑스인 이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린 시절의 성품교육이 그의 음악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28세 때 피오트르는 러시아를 방문 중이던 베르기의 소프라노 아르토랑과 약혼을 하였으며 그녀에게 Romance in F minor Piano곡(작품5번)을 헌정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다른 남자와 결혼 하였으며 피오트르는 후일에 “그녀는 나의 유일한 사랑이였다.”라고 고백하였다.
26살(1866년)에 피오트르는 니콜라이 루빈스틴이 창립한 모스크바의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77년 4월(37세)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한 여자 미루코바가 차이코프스키에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과 결혼 하지 않으면 자살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6월에 그는 미루코바를 처음으로 만나서 7월에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이 결혼이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 확신하고 집을 뛰쳐나오며 곧 이혼을 했다. 아마도 이때 피오트르는 여자와의 결혼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처 안토니나(Antonina).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난 차이코프스키는곱지 않은 시선을 돌리기 위해 결혼을 하였지만 이것은 작곡가를 거의 광인으로 만들었다.(1877년)
그해 10월 러시아의 한 부호 철도왕의 미망인 네데즈다 본 메크(1831-1894년) 여사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차이코프스키에게 연 6000루블이라는 거금을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하급 공무원의 연봉이 300~400루블 이였으니 이것은 거금이였으며 그 결과 피오트르는 음악원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38세가 된 그는 심포니 4번을 완성하고 본 메크여사에게 헌정하였으며 오페라 에브게닌도 완성하였다.
1877-1890년
차이코프스키의 후견인 겸 막역한 친구 나데제다 본 메크(Nadezhda Von Meck).이 플라토닉 애인은 13년간 1,200통의 편지로 서로의 우정을 나누며 살았다.
본 메크여사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은 전혀 여성답지 않은 여자이며 결혼 무용론자라고 털어 놓았다. 즉 결혼이란 자식을 낳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가족들까지 멀리하면서 사업에 몰두 하였으나 젊은 시절부터 음악을 사랑했으며 차이코프스키뿐만 아니라 니코라이 루빈스틴과 프랑스의 크로드 데뷔시도 지원하는 관대한 음악의 후원자였다.
이 두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는 않았지만 13년간 총 1200통의 편지를 교환하면서 차이코프스키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자신의 정신적 또는 정서적 내면을 고백하였으며 본 메크에게 차이코프스키는 “사랑하는 친구” 즉 플라토닉 애인이였다.
그러나 1890년 본 메크는 1년분의 후원금을 보내면서 자신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갑작스런 이별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이 있으나 본 메크여사의 재정적 불안정과 가족의 반대가 중요한 원인으로 보이며 일설에는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연애자임을 알게 된 것이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 또한 본 메크여사는 심한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1893년 차이코프스키가 사망한지 두 달 후에 생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손에 마비가 오기 시작하여 편지를 쓰기가 어려워졌으며 제 3자에게 이런 편지를 쓰게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성적관계를 배제한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여하튼 본 메크여사의 도움으로 차이코프스키는 학생을 가르치는 의무를 떠나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전 유럽을 여러 번 여행하면서 그의 음악은 국경을 넘어 국제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주 오가는 편지로 차이코프스키는 정서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예술을 후원하는 사람은 예술가에 버금가는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즉 한 예술가가 자신의 후원자에게 작품을 헌정하면 그 공의 절반을 후원자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음악을 사랑하는 귀족들과 부유층은 예술가를 후원함으로서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적 작곡가들은 편안하고 안이한 시절보다는 사랑, 실연, 절망, 죽음을 직면할 때 더 위대한 음악을 만드는 것 같다. 베토벤은 사랑과 실연을 반복하면서 월광 소나타 같은 명곡도 작곡하였으며 음악가로서 거의 치명적인 귀머거리가 되면서 그 고뇌를 이기기 위해 피아노 협주곡 5번과 심포니 9번 같은 대작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말러는 유태인으로서의 고뇌, 사랑하는 부인의 외도, 사랑하는 딸의 죽음, 치명적 심장병에 대한 공포감에 헤매면서 위대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나는 차이코프스키도 동성애라는 성적소수가 용납될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나 받은 갈등과 고난이 그의 음악을 더 감동스럽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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