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을 스치는 사람에게서 낯익은 향이 풍긴다. 돌아보니 젊은 청년이 걸어가고 있다. 라벤더향. 이 향을 좋아하던 20대의 추억이 가슴을 뛰게 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던 젊은 날의 일들이 영상으로 펼쳐진다. 그때 소녀는 문학에의 길을 향해서 불을 붙이고 있을 때였다. 불꽃이 스러질까 풀무질을 하면서 동서남북으로 뛰어 다녔다. 문학만이 아니고 클래식에도 심취되어 음악 감상실을 자주 찾곤 했다.
마침 문화원에서 열리는 ‘목요음악 감상회’에 나갔던 날이었다. 대부분 회원들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모여 있어서 서로 대화의 폭도 다양했다. J교수의 베토벤 9 심포니 해설이 끝나고 다과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때 여고생인 소녀와 한 여대생 뿐 모두가 남학생들이었다.
음악 감상회 회원인 S대 법대 선배의 각별한 관심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베토벤 심포니 감상을 나누는 시간인데 이번까지 3회에 걸쳐 들었는데도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합창과의 화음과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조합된 화음만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뿐 감상후담을 피력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영 편치 않았다. 그때 그 선배가 자신이 먼저 하겠노라고 나섰다. 막막했던 순간이 지나고 앞이 환해졌다.
선배에게 신세를 졌으니 차라도 한잔 대접을 하기로 했다. 덕수궁 담 길을 지나 법원 근처 찻집으로 향했다. 바람에 잠깐씩 스미는 향이 코끝에 머물렀다 날아간다. 그 향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너무나 좋았다. 선배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였다. 여고 2학년의 갈래머리 소녀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향 때문에 선배가 달리 보였다.
가랑비가 내린다. 잔디위로 방울방울 이슬이 맺히듯 비는 동그라미를 만들어 내려앉는다. 저만치 옆을 스치던 청년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소녀는 그에게로 다가간다. 바바리 깃을 세운 청년은 키가 꽤 큰 편이다. 빗줄기에 실려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퍼져 날린다. 가까이 다가 갈수록 진하게 전해오는 향, 그 향기를 쫓아 풀 섶을 헤치며 걸었다. 보이지 않는다. 바바리 깃을 세운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손을 휘저으며 찾아보았으나 진한 라벤더 향만이 날아다닐 뿐 정적만이 교교하다.
꿈이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선배의 모습이 또렷했다. 지금쯤 초로의 신사가 되어있을 선배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직도 그 향의 향수를 날리고 다닐까.
언젠가 명동입구에 있는 중화학교 앞에서 선배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모 은행의 상무로 있다면서 오랜만의 해후를 반가워했다. 아이들이 중화학교에 다닌다고, 그래서 학교에 다녀가는 길이라고 했다. 역시 그에게서 그 향기가 풍겨왔다. 학생시절에 맡았던 향수의 향이 여전히 내 후각을 자극하다니, 나는 순간 그동안 그 향기를 내심 그리워하면서 숨겨져 있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누구나 추억 하나는 다 지니고 있다. 추억을 반추하며 살아가는 삶이란 곧 아름다움이다. 그러고 보면 향기가 묻어있는 추억을 가슴에 담고 사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세상에 서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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