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동에 있는 ‘뚜레박’ 소극장에 갔다. 언제나 낭만이 출렁이는 동숭동 거리, 마로니에 공원의 추억들이 감동으로 떠오르는 이 길을 딸과 손을 잡고 걸었다.
옛 서울대가 있을 때 거닐던 느낌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조금 산만하지만 시대에 맞는 센티멘털리즘이 교차하는 대학로를 걸으니 나까지 젊은 세대의 흐름에 동승한 듯싶었다.
딸애와 동창인 N군의 연극을 보기 위해 소극장으로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층계를 더듬더듬 내려서니 희끄므레한 알전등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 작은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옆에 4인조 밴드가 흥을 돋우며 연주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흡사 지하 주점을 연상시키는 분위기가 여느 극장과는 다르다. 이곳 젊은이들은 그저 연극이 좋아서 모이는 연극광들이라고 한다. 배우들이 미친듯 연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가슴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N군은 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그야말로 혼신을 다하여 열연하고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6년 간을 줄곧 수재 소리를 들으며 졸업했다. 그런데 모 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하기는 했지만, 소신 있는 그 아이의 결정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흔히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도 부모나 사회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의지를 꺾는 경우가 허다한데, 역시 주관이 뚜렷한 청년이라 그럴 수 있었겠다 는 생각을 했었다.
몇 시간 동안의 연기를 위해 몇 달을 연습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 어디 연극뿐이겠는가. 딸들의 연주를 보고 있노라면 두 시간여의 공연을 위해 오랜 시간 연습에 최선을 다 한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젖을 때가 많다.
혼신을 다해 춤을 추는 무용수들, 하나의 도자기가 가마에서 구워져 나오기까지 거듭되는 실패를 이겨내야 하는 도공의 끈기,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화가와 조각가의 외로운 싸움은 또 어떠한가. 어떤 분야이건 완성의 실체는 곧 그 사람의 영혼의 향기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하나의 예술 작품을 성숙시키기 위해 작가나 배우는 온전히 자신의 혼을 거기에 불어넣는 것인지도 모른다.
N군의 열연하는 모습은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울고 웃었다. 나와 딸애도 눈시울을 적셨다. 극장 안은 배우와 관객이 하나가 되어 그가 울면 함께 울고 그가 고민하면 함께 고민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무대에는 먼 이국땅에서 향수에 몸부림치는 애절함이 엉키듯 떠다녔다. 그는 지금 가장 행복하고 가장 슬픈 감정의 엇갈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느끼고 표출하는 갖가지 표정들을 그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객석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긴 터널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 그렇게 관객들은 숨을 멈춘 채 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TV에서 주부 연극인들을 소개한 적이 있다. 중년 주부들이 모여 자신들이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열연하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도 그 무대에 합류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목이 쉬도록 열연하는 배우 정신이 나를 감동시키며 그들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었기 때문일까. 억압된 사회구조, 가정에 묻어 두었던 분노와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여 활활 타오르는 클라이맥스.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가는 처절한 몸부림이 사랑과 환희로 승화되는 모습들이었다.
밖은 어둠이 깔렸다. 대학로에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가늘게 떨고 찬바람이 옷섶으로 파고든다. 딸애와 팔짱을 끼고 지하도 계단을 내려갔다. 풀무질에 출렁이는 불꽃처럼 예술가들의 영혼의 향기가 내 몸을 뜨겁게 불사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