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심(悲心)
윤오영
문틈으로 새어드는 햇빛이 장판 위에 금줄을 그어 놓았다. 돌아앉은 아우가 몸을 앞으로 꾸부렸다 폈다 할 때마다 이 금색 줄은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다시 장판 위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우는 파란 항아리, 노란 항아리, 다홍 항아리들을 앞에다 놓고 이리 옮겨 보고 저리 옮겨 보며, 마치 어린애들이 완구를 가지고 놀듯 즐기고 있었다. 웃목에는 어린 두 조카가 꾸부리고 앉아 있었다. 여기는 깨소금을 담고, 여기는 고춧가루를 담고, 여기는 후추가루를 담고…… 색을 맞추어 찬장 위에 벌여 놓고 살겠다는 것이다.
내 계수는 삼개월 전에 수도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아우는 사랑하는 아내의 병을 구완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고 매일 밤을 병원에서 지냈다. 그는 자기의 몸을 완전히 잊고 오직 아내의 병에만 열중해 있었다. 나는 직업을 잃고 몸마저 극도로 쇠약하여 아우의 방을 지켜주고 있었다. 땀이 비오듯 하는 무더운 방에서도 문도 열기가 싫었다. 아우도 저러다가는 함께 가는 것이 아닌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무슨 불길한 운명의 검은 그림자가 엄습해 오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모든 것이 빨리 종말이 났으면 싶었다. 너무 지루하다.
계수의 병은 이미 구제할 길 없다는 판단이 난 지가 오래다. 오직 아우만이 그것을 믿지 아니할 뿐이다. 이제는 의사가 오늘 밤을 넘기기는 어렵다고 선언했다. 아우는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인간의 염원은 반드시 기적을 낳을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학의 진단 결과를 믿지 아니했다. 자기 아내의 생명이란 과학으로 진단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염원대로 기적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젊고 착한 아내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환자가 이미 숨을 거두려 했다. 그래도 그는 기적에 대한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환자는 드디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그래도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아니했다. 부활(復活)의 기적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슬픈 것은 현실이다. 시체는 운구되고 친척은 모여서 울고 초상은 치러야 했다. 아우는 멍하고 있다가 헉하고 쓰러져 울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금세 일어났다. 모든 초상 준비에 바빴던 까닭이다. 그는 또 장례 준비에 열중했다. 정성스럽고 세심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은 허공에 떠 있었다. 모두가 꿈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마 그가 정말 슬펐던 것은 장례가 끝나고 난 뒤였을 것이다. 차차 현실을 진실로 받아들였을 때는 오직 멍하니 허탈감에 잠겨 있었다.
그는 어제 오래간만에 자리에 누웠었다. 숙면이기 보다도 오히려 혼수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어린 자식들을 생각했다. 앞으로 어린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가야 할 것을 생각했다.
아침에 그는 세수를 하고 풀대님으로 문 밖으로 나갔다. 멀거니 서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무래기 어린 것들이 길에서 달음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 보다가 어린 애들을 따라 넓은 행길로 가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한길 노점에서 색 항아리를 사 가지고 들어왔다. 색항아리가 얼른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지금 그것을 방바닥에 벌려 놓고 즐기고 있는 것이다. 색을 이리 저리 맞추어 보며 있는 것이다. 문틈의 햇볕이 색항아리 위에 또 금줄을 옮기어 놓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신기한 모양이었다. 참 곱다고 혼자 감탄하며, 이윽고 나를 돌아다보고 “색깔을 이렇게 맞추어 보니까 참 이쁘지요.”하고 어린애같이 웃었다. “응! 참 이쁘다.”하고 웃어 보이려다 나는 눈물을 감추지 못해 돌아 눕고 말았다. 스스로 아픔을 참고 제 마음을 달래고 있는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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