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비움의 의식

concert1940 2008. 4. 23. 19:46
비움의 의식(儀式)

FM을 듣고 있다. 전파를 통해 전해지는 음률이 이렇듯 가슴을 아리게 하다니, 역시 음악은 마음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방송 진행자의 이야기 중에 한 구절이 와 닿는다.

미감(美感)이 뛰어난 영국의 어느 공작이 부호의 초대를 받고 방문하게 되었다. 그 부호는 공작의 한 마디 찬사를 듣기 위해 집안을 고급 가구와 장식으로 치장을 했다. 커튼과 침실까지 신경을 써서 화려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공작이 부호의 집에 도착하여 이리저리 둘러보고도 초조하게 기다리는 주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보다 비어 있었더라면 더욱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공작은 이 한 마디를 남긴 채 떠나가 버렸다.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내 안팎을 돌아보면 없애야 할 것들이 적지않다. 우선 내면에 가득 채워져 있는 인성의 이끼 같은 것들. 집 안에 쌓여 있는 가재 도구와 장롱마다 가득한 옷들, 그러고도 또 채우기 위하여 사들이고 끌어들이는 꾸러미들, 늘어만 가는 물건들 틈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지경이다.

비우는 법을 터득하려고 애를 쓴 지가 수년째다. 마음에 담아둔 세월의 찌꺼기를 비우고 내 집 안 곳곳에 쌓여 있는 것들을 버리면서 비우고자 했다. 부엌에 쌓여 있는 집기들, 남아도는 음식들, 눈만 뜨면 생겨나는 탐욕은 잠시 방심의 틈을 타고 또다시 채워지기 시작한다.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욕심 때문에 내 곳간은 지금도 만원이다.

백화점 사은 행사가 있을 때면 그 많은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영수증으로 바꾼 사은품이 들려 있는 것을 본다. 가져와 보면 별로 쓸모도 없는 것들인데도 여전히 그 사은품에 연연한다. 그래서 모자라는 만큼 더 사고 금액을 채우며 그것들을 받아 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나 역시 그랬다. 돌아와 풀어보고 씁쓸한 웃음을 짓곤 하지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은 글귀가 있다. “일상에서 소용되는 그 많은 물건들, 그것이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이어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되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이 글귀를 내 삶의 지침으로 삼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 나이에도 아직 스님의 말씀 언저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만큼 세상 때를 벗지 못하였음을 통감한다.

비움의 의식을 치르려면 ‘단식’을 해봄직하다. 다이어트를 하기 전 시작하는 게 며칠 간의 금식이라 한다. 몸에 쌓여 있는 노폐물을 다 체외로 내보내고 깨끗하게 내면을 비우는 작업을 한 후에 프로그램으로 들어간다. 이 의식은 누구나 한 번쯤은 건강한 신체를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비움의 단식으로 외출을 삼가는 방법이 그것이다.

정 필요한 식품은 근처 수퍼마켓을 이용하거나 냉장고를 뒤져서 남아 있는 것으로 사용한다. ‘견물생심’을 배제하자는 것이다. 한바탕 옷을 정리해 본다. 구석구석에 있는 옷들을 찾아 입을 것 입지 않을 것을 구분해 놓잿 처리한다. 부엌 물품들을 모두 꺼내 반드시 필요한 것과 꼭 있어야 할 것을 찾아 구별해 놓는다. 이런저런 월간지들, 두세 개의 신문을 한두 가지로 줄여 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마음밭에 깊이 뿌리 내린 끝없는 채움의 열망을 파헤쳐야 하는 것이 과제다.

비어 있는 곳에는 청정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곳에는 무거운 짐 대신에 자유로움과 채우기 위한 기다림이 있다. 좋은 옷과 현란한 보석은 없지만 행복을 나누는 마음이 있는 곳, 빈 공간이다. 아직도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는 못했으나 심오한 무소유의 향(香)을 조금은 알 것만 같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끝날, 어디를 돌아보아도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다. 도로에는 평소 몇 배의 차들이 쏟아져 나와 마지막을 아쉬워한다. 사람들의 표정은 저마다 이 해를 보내는 서운함과 새해를 반기는 미세한 흥분이 교차한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뜯는다. 되돌아보니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었다면, 그토록 곳간을 채우고자 헛된 세월을 보내지만은 않았을 것인데..
.
빈 몸으로 서서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나목, 그와 속내를 나누며 비움의 의식을 치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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