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동안이나 살던 곳을 떠나 이사를 했다. 흙을 밟고 나무를 가꾸며 정을 심고 살던 집에서 다세대가 사는 아파트로 옮기고 나니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허전한 마음이 든다. 새 집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앞산은 마치 산수 병풍을 두른 것처럼 검푸른 산자락마다 꿈을 가득 안고 서 있지만 그런 경관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동안 지내다 보니 차츰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큰 상자 안에 갇혀 있는 착각마저 든다. 저녁을 짓다가도 파 한 단, 두부 한 모를 사기 위해 승강기를 타야하는 게 처음엔 익숙지 않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작은 상자 안에 갇혀 서 있는 것조차 겸연쩍고 쑥스럽다. 벽면에 비치는 내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어쩌다 이웃집 바깥분과 단둘이 있게 될 때는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보통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크고 작은 사각 상자 안에 속해 있다. 어느 건물 안에 있든지, 자동차나 지하철을 타거나 그 규격만 각각 다를 뿐, 상자 안에서 숨을 쉬며 매일 매일을 보낸다. 상자 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마감한다.
테헤란로를 지나칠 때마다 거대한 빌딩을 본다. 그 안에 수백 수천의 작은 상자들이 들어 있다. 수 백 개의 네모난 창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으나 역시 안에도 작고 큰 상자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그 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는 느낌이 어떠할까. 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 높다란 빌딩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본다면 그 순간 마음에 모여드는 불안과 환희가 엇갈리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네모 안에 들어 있는 수천수만의 언어들, 희로애락, 그 안에서 호흡하며 살고 있는 생명체들, 어느 쪽을 돌아보아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문명의 이기는 때로 희열과 충동으로 몰아오는가 하면 어느 사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몽땅 앗아 가기도 한다. 인간에겻 가장 편리함을 부여하면서 서서히 활력을 감소시킨다.
너무 많이 걷고 걸어서 종아리에 알통이 박히던 시절은 그저 옛 이야기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네모난 공간은 존재하건만 그 시절엔 정겨움이 가득했었다. 어디를 가든 상자 안은 허술해 보였고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늘 한쪽 귀퉁이가 열려 있어서 누구나 드나들었다. 이쪽저쪽에서 지짐질 소리가 들려왔고 구수한 냄새가 날아다녔다.
그때 사람들에게서는 애정 어린 눈빛을 볼 수 있었고 서로 보듬어 주는 가슴이 있었다. 이웃을 감싸주고 감사하며 기뻐해 줄줄도 알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의 고리가 엮여져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비록 작고 볼품없는 곳이지만 큰마음을 가진 가족 간, 이웃 간에 화목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상자 안에서 보이는 세상은 어떠한가.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탈락하고 비정하리만치 이재를 따지면서 경계의 비상이 걸려 있지 않은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질주하며 고통을 감내하지 않는가. 작건 크건 상자 안에는 삶의 생존 카드가 감추어져 있다. 그것을 향해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개미처럼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마음이라는 사각 상자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아마 내게도 이재의 밝음과 탐심, 삶을 위한 끝없는 욕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망상과 절규가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은 어눌하게 보여 질지라도 상자 안에서 보는 세상이 결코 척박하지만은 않기를 바란다.
그 안에는 수억만 개의 별이 총총 떠 있는 거대한 우주도 있고 광활한 하늘 캔버스에 마음대로 붓을 휘저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기에, 비록 사각 상자 안일지라도 나는 여유와 사색에 빠질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그러나 얼마 동안 지내다 보니 차츰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큰 상자 안에 갇혀 있는 착각마저 든다. 저녁을 짓다가도 파 한 단, 두부 한 모를 사기 위해 승강기를 타야하는 게 처음엔 익숙지 않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작은 상자 안에 갇혀 서 있는 것조차 겸연쩍고 쑥스럽다. 벽면에 비치는 내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어쩌다 이웃집 바깥분과 단둘이 있게 될 때는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보통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크고 작은 사각 상자 안에 속해 있다. 어느 건물 안에 있든지, 자동차나 지하철을 타거나 그 규격만 각각 다를 뿐, 상자 안에서 숨을 쉬며 매일 매일을 보낸다. 상자 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마감한다.
테헤란로를 지나칠 때마다 거대한 빌딩을 본다. 그 안에 수백 수천의 작은 상자들이 들어 있다. 수 백 개의 네모난 창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으나 역시 안에도 작고 큰 상자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그 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는 느낌이 어떠할까. 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 높다란 빌딩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본다면 그 순간 마음에 모여드는 불안과 환희가 엇갈리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네모 안에 들어 있는 수천수만의 언어들, 희로애락, 그 안에서 호흡하며 살고 있는 생명체들, 어느 쪽을 돌아보아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문명의 이기는 때로 희열과 충동으로 몰아오는가 하면 어느 사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몽땅 앗아 가기도 한다. 인간에겻 가장 편리함을 부여하면서 서서히 활력을 감소시킨다.
너무 많이 걷고 걸어서 종아리에 알통이 박히던 시절은 그저 옛 이야기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네모난 공간은 존재하건만 그 시절엔 정겨움이 가득했었다. 어디를 가든 상자 안은 허술해 보였고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늘 한쪽 귀퉁이가 열려 있어서 누구나 드나들었다. 이쪽저쪽에서 지짐질 소리가 들려왔고 구수한 냄새가 날아다녔다.
그때 사람들에게서는 애정 어린 눈빛을 볼 수 있었고 서로 보듬어 주는 가슴이 있었다. 이웃을 감싸주고 감사하며 기뻐해 줄줄도 알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의 고리가 엮여져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비록 작고 볼품없는 곳이지만 큰마음을 가진 가족 간, 이웃 간에 화목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상자 안에서 보이는 세상은 어떠한가.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탈락하고 비정하리만치 이재를 따지면서 경계의 비상이 걸려 있지 않은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질주하며 고통을 감내하지 않는가. 작건 크건 상자 안에는 삶의 생존 카드가 감추어져 있다. 그것을 향해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개미처럼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마음이라는 사각 상자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아마 내게도 이재의 밝음과 탐심, 삶을 위한 끝없는 욕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망상과 절규가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은 어눌하게 보여 질지라도 상자 안에서 보는 세상이 결코 척박하지만은 않기를 바란다.
그 안에는 수억만 개의 별이 총총 떠 있는 거대한 우주도 있고 광활한 하늘 캔버스에 마음대로 붓을 휘저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기에, 비록 사각 상자 안일지라도 나는 여유와 사색에 빠질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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