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초상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막 도착한 문예지를 펼쳐든다. 한 달 동안 배달되는 책들이 서너 권은 되는데, 그 책을 일일이 다 읽어보기는 힘겹지만 먼저 제목을 골라 마음에 와 닿는 것을 고른다.
우연히 아무개의 글을 읽다가 죽음에 대한 글귀를 접했다. ‘죽음은 긴 이별이며 그 이별을 준비하는 기간을 살기위해 매일 연습 하는 것이 삶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문득 내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 내 존재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의문이 일었다.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돌이켜보자 별로 특기할 만한 것이 없는 것들뿐이다. 다만 암울한 전쟁을 겪었던 어린 시절, 감성에 목말라하며 명동 뒷골목을 헤매던 낭만파 자칭문학도 시절, 목이 터져라 시를 읊고 음악에 실려 눈물을 흘렸던 시대는 한쪽 귀퉁이가 아닌 내 심장 한복판이었을 뿐.
지축을 흔들며 달리는 지하철, 점점 사라지는 열차의 마지막 칸이 시야에 한 점으로 남겨져 있을 때까지 서 있어 본다. 인생은 바로 저 열차와 같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열차보다도 못한 것이 인생길이지 않을까. 뚜렷한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삶의 연속이기에.
차에 흔들리며 차창을 내다본다. 휙휙 바람이 일듯 멀어져가는 높은 아파트와 빌딩, 그 사이에 낀 삶에 찌든 낮은 지붕들이 슬퍼 보인다. 단풍이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싸하다. 마지막 생을 마감하는 나뭇잎이 혼신을 다하여 스스로 불태우려하는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일까.
파리 몽마르뜨 언덕 카페에 앉아 있는 화가 모델리아니, 알콜과 마약에 시달리며 그려 낸 그의 그림은 왜곡된 선과 외톨이의 슬픔이 잠식되어 있다.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어디에 가치를 두는가에 그 생은 화려하고 찬란하기도 할 것이며 어둡고 침울하기도 할 것이다. 외로운 화가 모델리아니를 떠올리니, 비록 자신을 돌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그가 부러웠다. 자부심과 열등감으로 반복된 일상의 간격을 메꾸기 위해 술과 약물로 지냈던 그가 36세로 요절할 때 “나는 행복했다”라고 할 수 있었음은 과연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달력 한 장이 매달려있는 것을 보면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초조와 긴장감이 온몸으로 쑤시고 들어온다. 지난 열한장의 달력을 떼어내며 어떤 생각들을 했던가. 지난날의 기억이 그림자처럼 남아있을 뿐 후회와 미련의 흔적뿐이다. 단 몇 년 전만이라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 존재는 좀 더 창의적이고 당당한 모습일 것인데. 떠나간 열차를 놓치고 후회하듯 그렇게 내 존재는 회한의 나날을 맞고 보내고 있다.
스위스에 사는 둘째를 방문했다. 오랫동안 계획하여 두 내외가 함께 지은 새집엘 갔다. 연습실과 객실, 확 트인 거실과 편리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유럽풍이면서 단순한 구조는 세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큰듯하지만 항상 음악인들과 하우스콘서트를 열기에 편리한 집이었다. 밖 테라스에서 바라보이는 알프스산은 유난히 날씨가 쾌청해야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머무는 일주일간은 예년 4월 같지 않게 날씨가 무척 좋아서 알프스 산에 하얀 눈을 볼 수 있었다.
배나무 한그루를 심어놓고 벌레 먹은 이파리가 안타까워 약을 쳐주는 딸애를 바라보며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려서 유학길에 올라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냈던 딸이 어느새 삶의 한 페이지를 열고 자신의 인생길을 구상하고 있으니 저 아이는 행복의 모습을 이미 보고 있는 것인가.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관과 인생철학이 있는 딸애는 이미 행복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정성스레 물을 주고 퇴비를 주어 소출을 바라던 밭에 마른 먼지만 풀풀 날아다니고 있는 버려진 내 마음 밭은 얼마나 될까. 그래도 욕심을 내며 그 밭에 꽃과 열매를 기다리는 초조함이 슬프다. 그것이 나의 삶이다.
바람에 휘어지는 미루나무 같은 내 행복의 초상화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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