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地上)에 있을 때 써먹어
초개선생이 발목이 골절되어 입원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딸아이와 병실을 찾았다. “어 나비가 날아 왔군” 하며 그만의 특이한 미소를 던진다. 자그마한 체구에 비해 머리가 남달리 큰 선생은 그래서 머릿속에 상상을 초월한 퍼포먼스가 가득한가 보다.
뉴욕에 있던 딸애가 귀국하여 아르코극장에서 첫 공연을 올릴 때다. 극장 안은 관객들로 웅성거리고 딸의 공연을 보기위해 와주는 분들을 맞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는데, 카페 옆 기둥에 기대 서있는 남자가 유심히 나를 주시하는 눈길을 느꼈다.
순간 멈칫하며 천천히 살펴보는데 그가 손짓을 건넨다. 누굴까 분명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궁금해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홍 유경씨 나 기억 안나요?” 그의 음성을 듣고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깜짝 놀랄 몇 십 년 전의 기억을 끌어내었다. “선생님, 영태선생님이시죠?” 너무 반가워 선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선생은 베레모에 버버리 차림으로 작은 키지만 나름대로 지성 극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고교시절 동인지를 만들며 문학에 입문했던 군단들 속에 초개선생과 나도 끼어있었다. 20여 년 전 미주리에 살고 있는 시인이며 기자 출신인 K가 왔을 때 비로소 초개선생과 대학로 산 낙지 집에 모여 앉았다. 초개선생은 여전히 여자단화를 애용하고 있었다. (발이 작아 남자 구두를 신을 수 가 없어서)나는 선생의 벗어놓은 구두를 보며 큭큭 웃었다.
이십 여 년 만에 공연장에서 다시 만난 선생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웬일이세요? 공연 보러 오셨어요?” 빙그레 웃으며 끄덕끄덕해준다. 초개선생이 시와 그림 외에 무용평론까지 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내 아이 공연에서 선생을 만나다니, 뜻밖이라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홍유경씨 딸이 춤쟁이였군” 빙긋이 웃으며 내 필명을 불러준다. 그로부터 선생은 내 딸에게 계속 지대한 관심을 보내주었다.
타계하기 전 병원치료를 다니면서도 틈틈이 징에 지인들의 얼굴을 그려 새겨 넣어 전시회를 열었다. 선생 사무실 옆 혜화당에서 열린 조촐한 전시회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떠나기 전 가슴에 담아 갈 지인들을 징속에 새겨 보고 싶었던 선생은 이미 지상에서 이사 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선생은 강화도 전등사에 수목 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우람한 나무아래 묻혔다.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운 육신을 훌훌 벗고 날아갔다. 병원에서 내게 “유경씨 내가 지상(地上)에 있을 때 부지런히 써 먹어” 웃으며 했던 말씀,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던 내 우둔함을 후회해본들 무엇하랴. “나비야 너도 필요한 게 있으면 다 가져가 내가 나아지면 나비가 춤출 대본을 줄께” 선생은 딸애의 손을 잡아주며 환하게 웃었다.
허허로운 광야에 늘 홀로였던 초개선생, 고독이 바로 선생으로부터임을 왜 진즉 몰랐을까. 정해진 공식대로 살다가 떠나는 우리네 인생이라면 선생은 별스럽고 특별하게 마치 외계인인양 자유인으로 살다 떠났다. 규격과 질서를 무시하며 타인의 눈총이나 입놀림도 개의치 않고 늘 환하게 웃고 지낸 분이다.
자그마한 체구이나 멋스런 분위기를 풍기며 후학들을 살피던 선생이 그립다. 장례의식에서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던 무용가의 눈물겨운 몸짓과 청아한 노래로 선생의 천도를 염원하는 소리가 전등사 경내 곳곳에 퍼져 날아다녔다. 유난히도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 J선생 곁을 떠나 초개선생은 우람하고 청청한 나무 밑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오호라 초개가 간다 / 당쇠르의 몸짓을 따라/ 사물을 넘어 마음으로
나는 떠나네. 천상으로/ 오호라 당쇠르들이여/ 혼불을 붙여라/ 존재의 무게를
털어버리게 여보 게들/ 선생이 외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대신 읊어본다.
이제 선생의 마니아들이 1주기를 기념하여 추모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온 나비야’ 라고 늘 불러주고 사랑해주던 딸아이가 ‘깨어진 약속’이라는 춤을 선생께 바친다. 선생이 늘 앉아 공연을 보던 아르코극장 객석, 그의 좌석에 꽃다발을 한 아름 올리련다.
선생이시여 비록 우리를 떠나 우주공간을 휘젓고 다닐지라도 눈까풀이 뽀얀 춤꾼들을 잊지 마소서. 당신을 위해 포에버 탱고를 추어드릴까, 하늘나라 무대가 좁을 정도로 정열적인 탱고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자리를 옮긴 초개를 놓친 아쉬움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 당쇠르(danseur)는 춤추는 사람을 의미한다. 춤추는 여자를 발레리나, 남자를 발레리노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이름이다.
초개선생이 발목이 골절되어 입원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딸아이와 병실을 찾았다. “어 나비가 날아 왔군” 하며 그만의 특이한 미소를 던진다. 자그마한 체구에 비해 머리가 남달리 큰 선생은 그래서 머릿속에 상상을 초월한 퍼포먼스가 가득한가 보다.
뉴욕에 있던 딸애가 귀국하여 아르코극장에서 첫 공연을 올릴 때다. 극장 안은 관객들로 웅성거리고 딸의 공연을 보기위해 와주는 분들을 맞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는데, 카페 옆 기둥에 기대 서있는 남자가 유심히 나를 주시하는 눈길을 느꼈다.
순간 멈칫하며 천천히 살펴보는데 그가 손짓을 건넨다. 누굴까 분명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궁금해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홍 유경씨 나 기억 안나요?” 그의 음성을 듣고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깜짝 놀랄 몇 십 년 전의 기억을 끌어내었다. “선생님, 영태선생님이시죠?” 너무 반가워 선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선생은 베레모에 버버리 차림으로 작은 키지만 나름대로 지성 극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고교시절 동인지를 만들며 문학에 입문했던 군단들 속에 초개선생과 나도 끼어있었다. 20여 년 전 미주리에 살고 있는 시인이며 기자 출신인 K가 왔을 때 비로소 초개선생과 대학로 산 낙지 집에 모여 앉았다. 초개선생은 여전히 여자단화를 애용하고 있었다. (발이 작아 남자 구두를 신을 수 가 없어서)나는 선생의 벗어놓은 구두를 보며 큭큭 웃었다.
이십 여 년 만에 공연장에서 다시 만난 선생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웬일이세요? 공연 보러 오셨어요?” 빙그레 웃으며 끄덕끄덕해준다. 초개선생이 시와 그림 외에 무용평론까지 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내 아이 공연에서 선생을 만나다니, 뜻밖이라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홍유경씨 딸이 춤쟁이였군” 빙긋이 웃으며 내 필명을 불러준다. 그로부터 선생은 내 딸에게 계속 지대한 관심을 보내주었다.
타계하기 전 병원치료를 다니면서도 틈틈이 징에 지인들의 얼굴을 그려 새겨 넣어 전시회를 열었다. 선생 사무실 옆 혜화당에서 열린 조촐한 전시회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떠나기 전 가슴에 담아 갈 지인들을 징속에 새겨 보고 싶었던 선생은 이미 지상에서 이사 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선생은 강화도 전등사에 수목 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우람한 나무아래 묻혔다.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운 육신을 훌훌 벗고 날아갔다. 병원에서 내게 “유경씨 내가 지상(地上)에 있을 때 부지런히 써 먹어” 웃으며 했던 말씀,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던 내 우둔함을 후회해본들 무엇하랴. “나비야 너도 필요한 게 있으면 다 가져가 내가 나아지면 나비가 춤출 대본을 줄께” 선생은 딸애의 손을 잡아주며 환하게 웃었다.
허허로운 광야에 늘 홀로였던 초개선생, 고독이 바로 선생으로부터임을 왜 진즉 몰랐을까. 정해진 공식대로 살다가 떠나는 우리네 인생이라면 선생은 별스럽고 특별하게 마치 외계인인양 자유인으로 살다 떠났다. 규격과 질서를 무시하며 타인의 눈총이나 입놀림도 개의치 않고 늘 환하게 웃고 지낸 분이다.
자그마한 체구이나 멋스런 분위기를 풍기며 후학들을 살피던 선생이 그립다. 장례의식에서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던 무용가의 눈물겨운 몸짓과 청아한 노래로 선생의 천도를 염원하는 소리가 전등사 경내 곳곳에 퍼져 날아다녔다. 유난히도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 J선생 곁을 떠나 초개선생은 우람하고 청청한 나무 밑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오호라 초개가 간다 / 당쇠르의 몸짓을 따라/ 사물을 넘어 마음으로
나는 떠나네. 천상으로/ 오호라 당쇠르들이여/ 혼불을 붙여라/ 존재의 무게를
털어버리게 여보 게들/ 선생이 외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대신 읊어본다.
이제 선생의 마니아들이 1주기를 기념하여 추모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온 나비야’ 라고 늘 불러주고 사랑해주던 딸아이가 ‘깨어진 약속’이라는 춤을 선생께 바친다. 선생이 늘 앉아 공연을 보던 아르코극장 객석, 그의 좌석에 꽃다발을 한 아름 올리련다.
선생이시여 비록 우리를 떠나 우주공간을 휘젓고 다닐지라도 눈까풀이 뽀얀 춤꾼들을 잊지 마소서. 당신을 위해 포에버 탱고를 추어드릴까, 하늘나라 무대가 좁을 정도로 정열적인 탱고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자리를 옮긴 초개를 놓친 아쉬움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 당쇠르(danseur)는 춤추는 사람을 의미한다. 춤추는 여자를 발레리나, 남자를 발레리노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