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내 안에 젊은 여인

concert1940 2010. 3. 6. 19:45

 머신에서 내리는 커피 향이 오늘 아침엔 유난히 짙다. 나의 아침은 원두를 갈고 머신에 커피를 내리며 서서히 열린다.

 

 어디론가 차를 몰고 간다. 쭉 곧은 길 양편에는 미루나무가 빽빽이 서 있어 줄을 그어놓은 듯하고. 이런 그림 같은 길에 연인의 작별을 그리기도 하고 연인의 사랑을 연출하기도 하는 그런 풍경이다.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미루나무 가지들 사이로 언뜻 언뜻 쪽빛하늘 조각이 조용히 나를 따라오는 정경이 20대의 나를 불러내고 있다.

 

 가슴을 떨며 매달리던 카사도의 첼로음이나 우아하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베토벤의 협주곡 황제에 매료된 시절로 몰아가고 있다. 나는 남성에 대한 열정대신 클래식에 침잠되어 홀로 소외된 나만의 공간에서 행복에 젖는다. 아득하지만 젊은 날의 찬란한 시간들을 가져다주는 메신저가 바로 내 안에 다른 젊은 여인이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수정 같은 피아노의 맑은 음역을 따라 흥얼거리며 미루나무 길을 벗어난다. 

 

 눈앞에 펼쳐진 호수의 자태가 요염하기 그지없다. 엷은 나무그림자가 물속에 출렁거리고 작은 풀잎마다 비릿한 물 냄새가 배어있다. 오리 몇 마리가 물살을 가르며 내 앞으로 헤엄쳐 온다. 호수바람에 흔들리며 날아드는 나비 한 마리, 내가 꿈꾸는 자유의 날갯짓이다.

 

 열정이 넘치는 내 안에 젊은 여인은 천천히 호숫가 돌계단에 걸터앉는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 바람에 실려 오는 풀냄새, 그 자락을 잡고 나풀나풀 춤추는 벌레들의 몸짓, 여인은 평화로운 여유의 낭만을 즐긴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가슴으로 파고드는 희열을 느끼면서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을 상기한다.

 

 그는 마음을 흔드는 시인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불사르는 화가이다. 캠버스에 자신의 혼을 집어넣고 희열과 고독, 슬픔을 옷 입힌다. 그와 여인의 시화전이 열리던 날, 그의 시구에 그녀의 작은 화폭을 둘러 함께 울고 웃고 환희에 몸을 떨었다.

 

 그는 폐결핵으로 하얀 얼굴이 되어가면서도 한 편 한 편 피 같은 시를 써 냈다. 짧은 생을 마감한 그는 마산출신의 ‘학원’지기였다. 먼 먼 추억의 한 페이지다.

 

 차츰 호숫가에 해가 비껴서고 회색하늘 저 편으로 파스텔의 수채화가 걸리기 시작한다. 강렬한 빛이 스러지는 모습은 처절한 아름다움이다. 모든 만물이 그러하듯 처음과 끝은 우주 궤도를 벗어날 수 없는 질서가 아닐까. 여인은 자신이 나비가 된 듯 저 먼 곳 꽃향기 그윽한 곳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한다. 미어질듯 종잇장 같은 날개를 흔들며 나풀나풀 날아간다.

 

 이어폰에서 전달되는 오페라 나부꼬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퍼져 날아간다. 우람하면서도 가슴을 후비는 듯한 갈구와 기도문을 노래하는 음역이 공중에 떠다닌다. 주위는 푸른 초장이요 일렁이는 호수가 춤을 추고 하늘은 이따금 마술을 부리며 구름조각을 다듬어 인사를 건넨다.

 

 여인은 지금 이 순간을 붙들고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 이런 환경에 울려 퍼지는 히브리노예의 합창은 과연 어떤 의미로 들려질까.

 

 뜨거운 감성과 잔잔한 사유가 넘나드는 작은 가슴속에 젊은 여인이 숨 쉬고 가늠 질을 한다. 그래서 그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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