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높고 청명하다. 올해는 추석이 좀 일러서인가 햅쌀과 과일이 미처 덜 여문 것 같다. 오랜 타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큰애 식구를 위해 송편 준비에 분주하다.
손녀 애들에게 추석에 빚는 송편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싶어서다. 외국의 추수 감사절과 같은 것임을 설명해 주며 함께 송편을 빚는다. 찰흙을 가지고 놀았던 아이들은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가며 재잘거린다. “이거 코리언 케잌이야?” 이 아이들에게 송편이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밖에. “그래 그런데 ‘송편’이라고 부르는 거야.” 아이들은 무척 재미있는 듯 손을 놓지 않는다.
한소끔 쪄낸 송편 모양이 다양하다. 송편은 두 아이의 개성대로 희한한 모양으로 빚어졌다. 아이들은 저희가 만든 것을 골라 먹으며 재미있어한다. 외국에서 태어나 9년여 남짓 그 문화에 맞추어 성장했으니 모든 것이 이상스럽기도 하고 신기한 모양이다. 오래간만에 손녀들 재롱을 바라보니 이제야 내가 정말 할머니가 된 것을 실감한다.
나의 외할머니는 마른 체구에 키가 훤칠하게 크셨다. 독립문이 있는 큰길에서 일본 군인들이 행군하는 뒤를 따라다니며 놀 때마다 할머니는 크게 노하시며 나를 꾸중하셨다. 아마도 대여섯 살쯤 때였으니 일본군이 누구인지를 알 리도 없고 그저 이상한 옷을 입고 칼을 차고 병정 놀이를 하는 것으로 보여졌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긴 담뱃대로 재떨이를 두드리시며 호통을 치셨다.
그러고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나를 당신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벽장에 감춰 놓은 단지를 꺼내 그 안에 담긴 것을 하나 꺼내 주셨다. 조청에 머루를 넣어 삭힌 것으로 여간 맛이 있지 않았다. “할머니, 나두 해따이상 할거야.” 야단을 맞으면서도 여전히 일본군인들 놀이를 하고 싶었을까.
늘 밥상을 대할 때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고추장을 먹게 하셨다. 얼마나 매운지 연상 호호거리며 혀를 날름대는 것을 보시고도 밥에다 이것저것 반찬을 함께 넣어 비벼 주셨다. 빨간 비빔밥을 싫다고 하지 않고 잘 먹는 나를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내게 소탈한 먹성을 가르치시느라 애를 쓰신 듯했다. 음식 속에서 다른 것을 골라내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고 더욱이 남기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임을 심어 주셨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언제나 내 손을 잡고 인왕산 아래까지 걸으셨다. 옛날 얘기를 해주시겠거니 기다릴라치면 늘 한석봉에 대한 말씀만 하셨다. 아마도 할머니께서 글씨를 잘 쓰셔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할머니는 큰 벼루와 붓과 습자지를 한 아름 사 오셨다. 그러고는 아버지에게 <<한석봉>> 천자문을 구해 오라고 부탁을 하셨다.
마침 아버지도 내게 천자문을 익히도록 할 생각이었다며 종로통 헌 책사를 뒤져서 누렇게 바랜 <<한석봉 천자문>>을 사오셨다. 그해 할머니는 타계하셨지만 나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언제나 먹을 갈고 천자문을 쓰면서 키가 크고 시원스런 할머니를 그리워하곤 했다.
이제 내가 할머니의 그 자리에 앉아있다. 과연 내가 할미로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심어주고 기억되게 할 것인지... 옛날과 지금은 너무나 변화되었고 아이들의 사고와 개성도 많이 달라져서 가르치기가 예사롭지가 않다. 특히 내 손녀들은 외가와 친가에 대한 개념이 아직은 확실치 않은 듯, 그저 두 할머니와 두 할아버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고모니 이모니 하는 호칭도 아직은 어른이 부르는 대로 따라 하고 있을 뿐이다. 좀 더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면 나를 인지시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내가 머물다 간 자리에서 아이들이 옛 추억을 되살리며 마음껏 꿈을 꿀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이 세상을 이슬처럼 맑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나도 꽤 괜찮은 할미로 남지 않을까 싶다.
송편을 거의 다 빚었다. 두 아이가 나머지를 빚느라 열심이다. 큰놈은 강아지를, 작은애는 이름도 모를 이상한 모양을 만들어 놓고 좋다고 깔깔거린다. 순간 마음이 스산해진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내 할머니 같은 그런 추억을 아이들에게 남길 수 있을는지,,. 또 내가 머물렀던 그 자리에 언젠가 아이의 어미가 앉아 그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남겨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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