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샘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 구활

concert1940 2014. 2. 7. 13:39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구활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구활

 

 

 

숲 속에 숨어 있는 절을 그려 보게. 화동들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숨바꼭질하듯 꽁꽁 숨어 있는 산사들 그리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어떤 아이는 솔숲에 가려 보일락 말락 하는 절간 처마를 그린다. 또 어떤 화동은 소나무 둥치 뒤에 서 있는 석탑을 그리면서 연신 흐르는 콧물을 옷소매로 훔치고 있다.

스승이 아이들 사이를 한 바퀴 휙 둘러본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나 보다. 덤덤한 표정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리에서 벗어나 산속 옹달샘을 보며 부지런히 스케치하는 소년이 보인다. 스승은 손짓으로 그를 불러 그린 그림을 펴보라고 한다. 수줍은 듯 혹은 자신이 없는 듯 겨우 펼쳐 보이는 그림 속에는 동자승이 물동이를 지고 산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스승은 무릎을 탁! 쳤다. 오늘 화동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곳이 보임이 화폭 속에 가득 담겨져 있지 않은가. 스승은 소년이 그린 숨어 있는 절 그림을 아이들 앞에 아무 설명 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하루의 사생 수업을 마친다.

숨어 있는 절을 솔숲에 가려 보일락 말락 하는 처마 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미 드러난 절이지 더 이상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곳의 보임이 미술에선 여백으로, 문학에선 상징과 은유로, 영화에선 찐한 그리움만 남는 라스트신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의 풍류 또한 그림 속의 동자승처럼 숨어 있는 절간은 보여주지 않은 채 그렇게 은근하게 존재해야지 진짜 풍류가 아닐까.

 

 

 

 

글을 보내면서

우리는 흔히 드러난 사건에 일희일비합니다. 드러난 것은 드러내는 사람이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따라 진실의 층위가 달라지는 데도 말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면에 숨은 것을 간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드러난 것이 이면에 숨은 진실과 정반대의 모습을 지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의도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동자승이 물동이를 지고 산속으로 걸어갑니다. 거기에는 절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한다면 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있되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여백이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가려져 있기에 생각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풍류라고 합니다. 자신의 팔할이 바람이라고 하는 작가의 바람이 솔숲에서 불어오는 듯합니다.

 

강병기